<모험왕>
<서울노트> <과학하는 마음> 등 국내에 '조용한 연극' 붐을 일으켰던 일본의 작가이자 연출가 히라타 오리자의 초기 대표작이다. 1980년 터키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정체성을 잃어가는 일본인을 그리는 이 작품은, 역시 흔히 말하는 '극적인' 표현 없이 인물들의 겹치는 대사와 여백 등으로 자연스러운 일상의 한 부분이 정밀한 구성 속에 펼쳐지며 부조리한 현 시대의 모습을 비춰낸다. 과거 <잠 못드는 밤은 없다> 등의 작품을 통해 히라타 오리자는 일본인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 그로 인한 외로움, 고독, 단절 등을 비춰냈는데, 이는 그 나라, 그 사람들의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잔잔하지만 큰 울림을 만들어 내고 있다. 14일까지 <모험왕> 공연이 이어지며 16일부터 26일까지는 히라타 오리자가 이끄는 극단 세이넨단과 한국의 성기웅이 속한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의 공동창작 무대이자 <모험왕>의 후속편 격인 <신 모험왕>이 공연된다.

<햇빛샤워>
19살 청년 동교와 그의 집 반지하 셋방에 사는 20대 후반의 백화점 직원 광자의 이야기를 통해 가난한 이 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을 비춘다. 광자는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동료의 고객을 가로채고, 승진하기 위해서라면 몸으로 때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둥바둥 사는 그녀는 이름만 바꾸면 자신의 삶도 달라질 것이라 믿는다. 동교는 연탄집 양자다. 그는 한 달 동안 부모를 도와 일해서 번 월급 10만원과 연탄 200장을 자신과는 아무 관계없는 동네 노인들을 위해 기부한다. 험난한 사회를 살아가는 두 남녀의 대응 방식은 결말에 가서 새로운 파국을 맞이한다.

<햇빛샤워>는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해서 무겁지만은 않으며, 성찰의 기회를 주지만 섣부르게 위로를 전하려 하지 않는다. 매일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 가슴 한 켠이 아릿해지는 것만으로 새로운 자극이 되기에 충분하다. 광자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김정민의 연기 뿐만 아니라 동교를 비롯해 주변인들을 연기한 극단 이와삼의 배우들의 호흡도 일품이다. <환도열차> <여기가 집이다> 의 장우재 연출의 신작.

<잘자요, 엄마>
<잘자요, 엄마>는 어느 날 갑자기 자살을 예고한 딸과 그녀의 엄마가 함께 보내는 마지막 밤을 그린다. 간질 때문에 사회생활이 어려운데다 이혼까지 하고 친정으로 돌아와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딸은 어느 날 저녁 엄마에게 두 시간 후 자살하겠노라고 말한다.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대로라면, 이 연극은 엄마가 딸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해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며 끝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연극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다소 어두울 수도 있는 이야기는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난생 처음으로 서로 깊이 소통하는 모녀의 모습을 통해 역설적으로 내 옆에 있는 가족의 소중함과 삶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나문희, 김용림의 깊이 있는 연기가 감동을 더하는 것은 물론이다.

글: 황선아 강진이 박인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