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뮤지컬 <고스트, Ghost>를 보러 갔더랬다. 우리에게는 ‘사랑과 영혼’으로 잘 알려진 1990년 영화를 원작으로 한 이 공연은 현재 피카딜리 극장에서 공연중이다. 보는 이들마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 그대로를 그대로 옮겨온 인상을 준 이 영화에 커다란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 마치 공연장에서 지난날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의 장면 장면들을 복기하는 기분이랄까? 특히나 뉴욕의 도시적 배경을 표현하기 위해 과다하게 사용된 프로젝션과, 안무 등은 많이 안타까웠다.

믿음 그 자체, 니하이 극단
반면에 영국에서 니하이 극단(Kneehigh Theatre)의 공연소식은 언제 들어도 반갑다. 철저하게 무대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그 한계성에서 출발하여 극적 아이디어와 무대 장치로 스토리를 엮어가는 그들의 창작성은 언제나 보는 이들을 자극하고 즐겁게 한다. 영국 콘월에 자리잡은 니하이는 특유의 극적인 스토리 텔링 기법으로 영국 공연계에 선명한 이미지로 각인된 극단이다. 특히 노엘 코워드의 흑백영화 <브리프 인카운터, Brief Encounter>를 연극적인 기법과 교묘하게 조합한 2008년의 무대극은 많은 사랑을 받으며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한 바 있다.


그리고 올해 무대에 오른 <더 와일드 브라이드> 또한 이 연장선상에서 120% 니하이스러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공연은 현재 리릭 해머스미스 극장(Lyric Hammersmith Theatre)에 초연되어 평단의 좋은 평가를 받으며 순항 중이다.

동화에서 출발한 스토리
작품의 스토리는 그림(Grimm) 형제가 수집한 <손 없는 소녀, The Handless Maiden>에 기반한다.

악마에게 부를 대가로 뒤뜰에 있는 모든 물건의 거래를 제안 받은 농부는 자신의 딸이 미쳐 뒤뜰에 있는지 모르고 거래에 응한다. 뒤늦게 자신의 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안 농부는 악마에게 거래 취소를 요청하지만, 이미 소녀는 악마에게 넘어간 후이다. 하지만 소녀가 너무나 순결하여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악마는 다시 농부에게 소녀의 손을 자를 것을 명령하고, 손이 잘린 후에도 소녀를 손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악마는 소녀를 야생의 숲에 남겨둔다. 야생에서 점점 숲과 나무와 동화되어가던 소녀가 어느 날 왕자의 배 밭에서 배를 따먹다가 왕자에게 발견되고, 배들의 숫자를 새는 것에 집착하는 코믹한 왕자는 여자에게 의수를 선물하며 구애한다. 둘은 결혼하게 되고, 왕자가 왕이 되어 전쟁터에 나간 사이 여자는 아이를 낳는다. 이 소식을 전하던 중간에 악마의 속임수로 여자와 아이는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지만 도망치게 된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모자는 다시 숲에 들어가고 나중에 이 오해를 알게 된 왕은 7년간 이들을 찾으러 다니다 극적인 해후를 하게 된다.


진실성에 다가가는 엠마 라이스의 연출
이번 공연은 비록 사실성이 빈약한 동화에서 출발했지만, 연출가 엠마 라이스(Emma Rice)의 스토리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에 여러 가지 극적 장치들이 덧입혀지면서 관객들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시적인 내러티브와 함께 음악이 극의 흐름에 중요한 역할로 작용하면서, 작품은 한 여성의 일대기를 서사적으로 바라보는 느낌마저 든다.

특히 작품이 가진 서사성은 여러 삶의 굴곡을 경험하는 주인공 여자를 세 명의 여배우가 연달아 연기하게끔 고안한 엠마 라이스의 절묘한 선택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소녀(The Girl), 야성(The Wild), 여인(The Woman)으로 명명된 이 세 명의 배우들은 작품의 시간적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고도 일관성 있게 한 명의 캐릭터를 연달아 연기하는데, 각각의 배우들이 묘사하는 주인공의 모습도 개성 있을 뿐더러 배우에서 배우로 주인공이 전이되는 과정도 매우 흥미롭다.

절묘하게 맞닿아 있는 블루스의 애환
또한 스투 바커(Stu Barker)의 극 전체를 통과하는 감성적인 음악은 1930년대 미국 흑인들의 애환을 노래했던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의 블루스 영역과 밀접히 맞닿아 있다. 동화의 영역에서 출발했지만, 블루스의 아련하면서도 애절한 음악, 원시적인 느낌의 안무, 간결하지만 충분히 효과적인 조명 디자인 등은 작품의 진정성을 배가시킨다.

나레이터이자 악마 역할을 연기했던 스튜어트 맥로린(Stuart McLoughlin)의 감칠맛 나는 노래와 더불어 그의 사악한 위트와 풍자는 관객들을 극으로 끌어들이는 촉매제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는 모습이고, ‘소녀’역의 오드리 브리슨(Audrey Brisson)의 애절한 목소리 또한 고대 샤먼이 신을 부르는 의식을 연상시키며 각인된다. 그리고 ‘여인’역의 에바 메기어(Eva Magyar)의 깊이 있는 연기는 극의 클라이막스에 탄력을 주고 있다.

신기하게도 그리고 절묘하게도, 작품의 주인공인 소녀는 2시간의 공연동안 직접적인 대사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했던 주인공의 진정성이 관객들에게 잘 전달되었던 이유는 이 소녀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과 극적 장치들이 주인공의 아픔을 잘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쉽다면
니하이의 다른 극단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이런 매력들은 약이기도 하지만 독이 될 수도 있다. 스토리에 덧붙여지는 포크 스타일의 음악, 퍼펫들,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소품들, 브레히트스러운 극적 기법들은 니하이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작품을 여럿 본 관객이라면 한번쯤은 같은 스타일에 작게나마 불평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불평은 작품이 진정성을 가지고 관객들에게 다가오면 가만히 사그라지고 만다.

사진: Steve Ta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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