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서 제대로 자보기

‘공연 좀 본다는 사람’에 속하는 ‘공연인’으로 분류되는 사람 중 한 명이지만 가끔은, 부끄럽게도, 공연 중 졸았던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제대로 된 숙면이기보다는 혼이 빠져나간 듯 비몽사몽의 느낌이 더 정확한 상태였겠지만. 아무튼 재미가 덜한 공연일수록 졸음과의 사투를 벌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은 다른 관객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리라.

배우들의 대사가 자장가처럼 들리기 시작했다면?

사실, 공연장만큼 잠자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곳도 드물다. 주위 관객들만 크게 의식하지 않고 또 그들을 크게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무대 위에서 열심인 배우들에 대한 커다란 죄책감의 짐만 잠시 내려 놓는다면 공연장은 정말 잘만한 장소다. 적당히 어두운 주위환경과 더불어 적막함 속에 자장가처럼 들리는 배우들의 리드미컬한 대사, 거기에다 공연이 보통 저녁 7시 반에 시작하는 관계로 무슨 음식을 먹던 적당히 위를 채운 상태에서 편안한 의자에 1시간 이상 큰 움직임 없이 가만히 앉아있는데 정신을 말똥말똥하게 유지하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공연 중간에 잠을 깨려는 노력은 눈물겹도록 처절하다. 손을 맞대어 문지른다거나, 다리를 꼬집는다거나,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던가 하는 끊임없는 자극을 통해 깨어나려고 노력하지만, 공연 중간에 한번 잠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맑은 정신상태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다. 1막이 끝난 후 밖에 나와 잠시 바람을 쐰다던가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면서 심호흡을 다시 하고 온 후에야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공연장에서 자는 것만큼 아쉬운 것도 없다. 다른 장르의 예술에 비해 시간적 공간적인 한계가 명확한 실시간 예술인 공연이야말로 졸다가 장면들을 놓쳤을 때 아쉬움은 공연이 끝난 후 티켓 가격에 비례하여 커지게 마련이다. 시간 내어 비싼 티켓 값을 지불하고 거기에다가 차비 들여 공연장까지 찾아가 조는 행위 따위가 얼마나 비생산적인 짓인지 생각해보면 비참하기까지 하다.


런던 공연의 중심 바비칸(Barbican)에서 제대로 자보자

2011년. 바비칸 극장에서 공연될 한 공연에 대해서 만큼은 더 이상 공연장서 잠들어버리는 행위를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을 것 같다. 공연의 이름은 <자장가, Lullaby>. 관객들이 편안하게 극장에서 잠들 수 있게 모든 것을 제공하는 공연이다. 2004년 <세 바비칸!, C’est Barbican!>으로 올리비에상을 받았던 시어터 컴퍼니 덕키(Duckie)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공연이다.

이 공연의 의도는 분명하다. 관객들이 잠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적이다. 관객들은 바비칸 핏 시어터(Barbican Pit Theatre)에 저녁 10시까지 도착, 잠옷으로 갈아입고 양치질을 한 후 10시 30분부터 시작되는 공연을 보게 된다. 공연장 안에는 1인용에서 3인용 침대까지 준비될 예정인데, 단순히 관객들은 친구와 아니면 연인과 함께 이불 속에서 공연을 보다 졸릴 때 자면 그만이다. 90분의 공연 시간 내에 모든 관객들이 잠들기 바라는 이번 작품의 내용은 아직 자세하진 않으나 마음을 위로하는 스토리텔링과 함께 잠들게 도와주는 편안한 합창곡 등으로 엮어진다고 하니 혹시라도 불면증이 있는 관객들도 시도해 볼 만 하다.

이번 공연의 티켓 가격은 한 사람에 42파운드(약 8만원)로 책정되었는데, 여기엔 침대와 잠을 도와주는 공연뿐 아니라 아침 모닝콜, 샤워 그리고 아침 식사를 포함한 가격이라고 한다. 런던 유수의 1박 호텔 가격이 이와 비슷한 편이라고 하니, 숙식에 공연까지 보여주는 이런 특이한 하룻밤은 꽤 적당한 가격인 듯 보인다.

내년 6월 24일부터 한달간 공연될 예정인 이번 공연의 프로듀서 사이먼 카슨(Simon Casson)은 인터뷰에서 공연장에 갈 때마다 졸음이 쏟아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왜 관객들이 편하게 잘 수 있는 공연은 없을까를 생각하다 이번 공연을 만들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더불어 그는 이번 공연이 어렸을 때 침대 맡에서 자기 전 동화책을 읽어주던 엄마와 같이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선한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시어터 컴퍼니 덕키

이번 공연의 제작사인 시어터 컴퍼니 덕키는 끊임없는 신선한 아이디어로 관객들에게 즐거운 경험을 제공하는 제작사로 유명하다. 지루해지기 십상인 클래시컬한 형태의 공연보다는 ‘진보적인 노동자 계급의 엔터테인먼트’를 지향하는 덕키의 공연들은 그래서 매우 직관적이고 솔직하다.
6년 전 바비칸에서 공연되었던 <세 바비칸!, C’est Barbican!>도 당시 평론가와 관객들의 찬사를 동시에 받으며 그 해 올리비에상 최고 엔터테인먼트상을 수상하기도 했었다. <세 바비칸!>의 경우도 관객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데, 카바레 스타일의 공연장에 테이블마다 앉은 관객들이 30여가지 이상의 짧지만 화끈한 벌레스크 스타일의 공연들이 나열된 메뉴에서 6가지 정도의 공연을 골라 보는 형식이다. 식당에서 메뉴를 보고 음식을 골라 먹는 형식과 비슷한 개념이랄까?

불면증에 시달리는 그대에게, 이 공연을 바친다 

우리는 가끔 6시간 짜리 연극이나 12 시간 이상 밤새워 공연되는 시리즈 공연물들을 접하기도 한다. 작품의 의도는 분명 좋겠지만, 사실 관객의 입장에서 3시간 이상 지속되는 공연은 집중하기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자장가> 공연은 완전 ‘관객- 프렌들리’ 공연이 될 듯 하다.
소위 ‘제 4의 벽’이라 불리는 무대와 관객 사이의 간극을 미련 없이 허물어 버리는 이러한 덕키의 스타일을 미루어 볼 때,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이번 관객 잠재우기 프로젝트가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내심 기대된다. 과연 마이클 빌링턴 같은 저명한 평론가들이 파자마와 치약, 칫솔을 챙겨 들고 공연장에 와서 하룻밤을 자면서 쓰는 평론은 어떨지 상상해보면 벌써부터 재미있다.

웨스트엔드에서 아주 인기 있는 어느 스펙타클 대형 뮤지컬의 한 공연 날, 글쓴이의 앞자리에 앉아 1, 2막 총 2시간 반 동안 고개 숙이고 편안하게 주무셨던 어느 아저씨에게 이번 공연을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이다.

사진: Duckie 홈페이지

 
[ⓒ 플레이DB www.playdb.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