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싱글와이프’ 정재은, 격정적인 연극 무대로 컴백 <발렌타인 데이>

작성일2017.12.22 조회수6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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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정재은이 <피카소 훔치기> 이후 1년 만에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온다. 1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그녀에게는 색다른 사건이 있었다. 남편 서현철 배우와 함께 출연한 예능프로그램 <싱글와이프>에 출연해 세간의 화제에 오른 것이다. 엉뚱하고 꾸밈없는 그녀의 모습은 많은 시청자들에게 호감을 줬고, 더 많은 이들이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서현철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이기 이전에, 여전히 세상을 향한 순수한 호기심과 열정을 간직한 아름다운 여성으로서.
 
그리고 이제 그녀는 연극 <발렌타인 데이> 무대에 올라 배우로서의 진가를 다시 펼칠 예정이다. 러시아 작가 이반 븨릐파예프가 쓴 <발렌타인 데이>에서 정재은은 18세부터 60세까지 평생 한 남자만을 사랑한 여인 ‘발렌티나’로 분한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결혼생활에서 새로운 행복을 발견했다던 그녀는 집요할 만큼 깊고 오랜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 연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Q 연극 <발렌타인 데이>는 어떤 작품인가요.
한 남자와 두 여자가 서로 사랑으로 얽혀서 펼쳐지는 멜로 드라마에요. 발렌티나라는 여자 주인공이 젊은 시절 뜨겁게 사랑했던 남자와 헤어져요. 그 남자는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시간이 흐른 뒤 죽게 되죠. 그런데 예순 살이 된 발렌티나는 평생을 그 남자에 대한 기억 속에서 살고 있는 거에요. 가장 격정적이었을 때, 가장 행복했을 때, 가장 황홀했을 때 등 그 남자와의 기억들이 펼쳐지면서 여자의 하루가 흘러가요. 스토리가 차례대로 정리되는 게 아니라 기억들이 파편처럼 쓱쓱 지나가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게 뭐지?’ 하실 수도 있어요. 그런데 보다 보면 그게 다 퍼즐처럼 맞춰질 거에요. 그런 부분이 굉장히 연극적이고 재미있죠. 공연을 보며 긴장을 놓칠 수가 없어요. 주인공의 가장 강렬했던 기억들이 필름처럼 툭툭 나오기 때문에, 장면 장면이 다 긴장감 있고 아름답고 시적이고 격정적이에요.
 
Q 이야기가 주인공들의 현재와 과거, 내면의 기억을 오가다 보니 조금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저도 그 부분이 어려워요. 공연이 발렌티나의 기억과 생각과 감정으로 움직이는 거라 두 시간 동안 발렌타인이 생각하고 겪고 느끼는 대로 호흡을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되거든요. 그런 부분이 감정적으로 좀 힘들더라구요.
 
또 힘든 것이, 발렌타인이 참 대단한 여자거든요. 열 여덟 살에 한 남자를 사랑했고, 결국 부모님의 반대로 그 남자와 이뤄지지 못했는데도,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는데도 예순 살이 된 지금까지 그를 잊지 못하고 살고 있는 거에요.
 
Q 그런 마음이 공감되시나요?  
옛날의 저라면 공감된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의 저라면…저도 궁금해요. 어떻게 그런 마음으로 살 수 있는지. 아마도 이뤄지지 못한 사랑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우리는 뭔가를 이루고 나면 그게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게 되잖아요. 발렌티나도 발렌타인과의 사랑이 이뤄졌다면 우리처럼 일상적인 삶을 살았을 수도 있는데, 이루지 못한 사랑이기에 더 집착하지 않았나 싶어요. 또 성격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요. 같은 걸 봐도 남과 다른 걸 느끼고, 같은 일을 겪어도 남들보다 더 깊게 상처받는 사람들. 아마도 발렌티나는 그런 여자가 아닌가 싶어요.
 



Q 발렌티나와 까쨔의 관계도 흥미로워요. 한 남자를 사랑했던 두 여자인데, 서로 미묘한 애증의 관계 같아요.  
발렌티나에게 까쨔는 한 남자를 사랑한 원수 같은 여자지만, 동시에 유일한 친구이기도 해요. 너무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관계 같아요. 어떻게 보면 발렌티나는 남자가 죽은 순간부터 함께 죽어있는 것 같아요. 근데 까쨔가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까쨔와 매일 싸우고, 서로 여우 같은 년, 깡패 같은 년이라고 욕도 하고, 그러다가 또 아무렇지 않게 장난도 치고 함께 한 남자를 그리워하죠. 서로 동질감을 느끼기에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둘 다 대단한 여자들인 거죠. 과거의 추억으로, 생각들로 일생을 사는 거니까요. 그것이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에너지에요. 저는 상상이 안가요. 저는 그렇게 안 살 거에요. 저는 그냥 알콩달콩 토끼 같은 자식과 살고 싶어요(웃음).
 
Q 극 중 “사랑은 끝없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원해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사랑하게 된 겁니다”처럼 사랑에 대한 인상적인 대사가 많아요. 개인적으로 가장 와 닿았던 대사를 꼽으신다면.
“유감이야. 그때 우리가 얘기하지 못한 거. 그때 우리가 기다리지 못한 거”라는 안타까운 대사가 있어요. 그 때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서로 이야기를 했다면 그들의 사랑이 이뤄졌을 지도 모르죠. 결국 모든 것은 타이밍인 것 같아요. 그 ‘순간’을 넘기면 다른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그 순간을 넘기지 못해서 사람들이 여러 일들을 겪으며 사는 것 같아요.
 
Q <푸르른 날에> 이후 오랜만에 이명행 배우와 함께 호흡을 맞추시는 거죠. 배우들 간의 호흡도 기대됩니다.
명행, (이)봉련은 설명할 필요 없는 좋은 배우들이라 그들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들이 있기에 제가 그나마 버티고 갈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너무 고맙죠. 너무 훌륭한 배우들이라 제가 많이 의지하고 있어요.
 



Q <발렌타인 데이>는 주인공들의 18세, 25세, 그리고 60세를 오가며 펼쳐지죠. 개인적으로 18세, 35세 무렵을 돌아보시면 지금과 어떤 부분에서 가장 크게 달라지셨나요?
상황과 환경은 많이 변했지만, 본질적인 부분은 크게 변한 것 같지 않아요. 아직도 항상 철이 안 든 것 같고, 마음은 이십 대 때와 똑같거든요. 나는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모든 게 변해있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생각해보면 이십 대부터 오십 대까지 삼십 년을 쉼없이 빠른 속도로 달려온 것 같아요. 일이든 사랑이든 결혼이든 아이든 친구와의 만남이든, 순간순간 뭔가에 열중하면서. 그래서 어느 한 순간도 지루했던 순간은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그 순간 순간엔 너무 힘들었죠. 죽고 싶은 때도 있었고,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적도 있고, 친구한테 배신 당해서 인생이 너무 허무했던 적도 있어요. 남들이 겪을 수 있는 일들을 다 겪은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모든 시간을 돌이켜보면…그게 다 저의 삶 속에서 하나의 스토리처럼 일어난 것 같아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이 연극의 발렌티나도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60살이 된 지금 그 모든 순간들을 기억해내는 게 아닐까 싶어요. 왜 살면서 가끔씩 옛날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잖아요. 그 순간엔 절망적이기도 하고 희망적이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내 삶이 그렇게 지나와야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후회나 미련은 없어요.
 



Q ‘사랑’에 대한 생각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결혼 이후로 성격도 많이 달라졌다고 하셨죠.
예전엔 지금처럼 이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생각을 바꿀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남편 덕분이에요. 인생에서 우리 남편을 만난 건 최고의 행운이었어요. 남편은 무뚝뚝한 편이지만,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제가 받았던 상처들도 다 사라지는 것 같아요. ‘네가 어떻든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다. 그러니까 네가 거기에 요동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거든요. 아무리 발버둥치고 가슴 아파해도, 혹은 너무 행복해해도 결국 다 똑같으니 잘돼도 너무 좋아하지 말고, 잘 안 되도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중간을 지키라고 해요. 그 얘기를 하도 듣다 보니 제가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더라구요. 좋은 일이 생겨도 ‘그래 좋네’하고 담담하게 생각하고, 너무 힘들어도 ‘곧 지나갈 거야’ 하고. 그러다 보니 지금에 더 집중하게 되고요.
 
은조(딸)를 만난 것도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이에요. 예전에는 ‘자식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적이다’라는 말이 피상적으로만 느껴졌는데, 자식을 낳아보니 정말 아무리 끊어내려 해도 끊어지지 않는 절대적인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힘들 때도 바로 아이를 생각하게 되고, 아이가 제 삶의 힘이고 원동력이에요.
 



Q 반면에 배우로서는 출산, 육아를 겪으며 힘든 순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출산하고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처음엔 아이를 어떻게 안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이가 다칠까 봐 젖 주는 것도 너무 무섭더라고요. 삶이 너무 무섭고 불안한데 내가 이걸 잘 넘겨서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까, 하는 절망감과 상실감이 컸어요. 그런데 마침 그때 남편이 했던 공연이 너무 잘돼서 남편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남편은 매일 흥분되어 있고 늘 기분이 좋고, 저한테는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더라고요. 그 때 처음으로 남편이 너무 부럽고 많이 힘들었어요. 외롭고, 내가 모든 걸 다 감당해야만 할 것 같고. 저 사람은 무대에 서서 저렇게 행복한데, 나는 어쩌면 앞으로 무대에 못 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배우로서 작업할 때마다 느끼는 상실감과 자괴감은 늘 있는 것 같아요. 항상 힘들어요. 제 자신에게 부족함을 많이 느껴서 그런가 봐요. 연극을 한다는 게 타인의 삶을 대신 얘기해 주는 거잖아요. 그들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 모든 것을 흡수해서 그들의 삶을 고스란히 잘 보여줘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될 때 참 어려워요. 지금은 발렌티나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 그녀가 어떻게 살았을지 궁금하고, 참 대단한 여자인 것 같고.
 
Q 발렌티나처럼 60살이 되셨을 때 어떤 모습으로 살고 계시길 바라나요.
그 때도 많은 분들이 저를 불러 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배우로서 ‘이것이 정말 배우구나’ 하고 진정으로 감동을 받았던 순간이 있는데, 백성희 선생님과 공연을 할 때였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선생님이 그때 여든 여덟 살이셨는데, 저랑 마지막 공연을 하셨어요. 명동예술극장에서 <바냐 아저씨> 무대에 서셨고, 일본에서도 공연이 있었는데 일본 공연 리허설 때 선생님이 아프셨어요. 공연을 하실 수 있는 체력이 아니었죠. 일본 무대감독이 공연을 안 하셔도 된다고, 취소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선생님이 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공연 첫날 무대에서 연기를 하시고 (무대 뒤로) 걸어 오셔서 객석이 안 보이는 순간 쓰러지셨어요. 그렇게 계시다가 다시 나가서 연기를 하시고. 커튼콜 때 정말 펑펑 울었어요. 잊을 수 없는 모습이었어요. 그런 에너지, 그런 열정을 잃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선생님의 발끝만큼 이라도 따라가고 싶은 마음. 나이를 먹어도 그런 열정이 식지 않으면 좋겠고, 많은 분들이 불러줄 수 있는 좋은 배우가 되면 좋겠어요.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배경훈(Mr.Hodol@Mr-Hod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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