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을 바란다. 그리고 그 탐욕은 현실에서도 동화에서도 사람을 파멸로 이끈다. 동서양 비극의 만남인 ''리어는''은 그에 대한 아주 극단적인 예가 되어주었다. 권력을 위해 아버지를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형제끼리 칼을 겨누었으며 동생을 죽였다. 사도세자의 시대도 리어왕의 시대도 권력에 목숨이 좌우될 수 있는 그런 시대였다고 하지만 이 추악한 악행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권력이 부딪히는 난잡한 중에 코델리아의 충언은 무시되고 고너릴의 교언은 그녀에게 힘을 주었다. 명분은 백성을 위함이었지만 아버지의 뒤에선 백성에 대한 일말의 연민도 없었기에 그 힘은 백성을 위해 사용되지 못했다. 모든 것을 가진 고너릴에게 있어서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그녀에게도 죽음은 찾아왔다. 어찌보면 지금의 현실도 별 다를 것 없이 대조된다. 선한 자의 충언은 무시되며 악한자의 교언은 힘을 가진다. 언론과 여론 앞에서는 국민을 위하는 척하지만 그 뒤는 그저 있는 자들의 권력 다툼 뿐이다. 이제 남은 것은 죽음 뿐이지만 그런 비극이 오지 않길 바란다. 이는 ''리어는''이 도와줄 것이다. 더 많은 사람과 앞으로의 미래가 될 청소년들이 이 연극을 보고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도약했으면 좋겠다. ''리어는''은 표면적으로 봐도 흠이 없었다. 그 배우들이 모두 선생님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발성과 감정표현이 훌륭했다. 평소 신나고 요란한 공연에만 익숙했다면 한 번쯤 시도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사실은 유쾌한 연극을 보고 싶었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유쾌함과 거리가 먼 가슴 아프고 어이없는 현실이기에 연극에서만이라도 현실을 속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리어는''은 그러나 그런 안이한 기대를 아프게 깨준다. 그럴수록 우리의 현실과 맞닥뜨려 보라고 한다.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은 개인과 가정, 권력과 국가, 물러남과 피어남, 자연과 운명 등 넓은 범위에 걸쳐 다양한 주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고전 비극이다. ''리어는''은 그런 대작을 소극장 상연용으로 최적화했으면서도 또 무언가 새로운 의미를 더 생각해 보게 한다.

목숨과 맞바꾼 가치는 무엇인가?
모든 것을 가지고 권력과 영화를 누리던 리어왕, 그의 경솔한 권력 이양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음모와 암투. 극 속의 주요 인물들은 극의 대단원에 이르러서는 목숨을 잃는다. 리어왕이 가장 사랑했지만 진솔함과 냉정한 명분을 중시했던 셋째딸 코델리아는 첫째딸 고너릴에 의해 재기에 실패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글로스터 백작의 서자 에드먼드는 서자의 서러움을 딪고 권력의 중심으로 질주하지만 그가 꿈꾸던 개혁도 에드거의 칼 끝에 독을 묻힌 고너릴의 간교함에 종말을 맞는다. 사랑을 선택했던 둘째 리건도 고너릴의 계략으로 에드먼드와 함께 독살된다. 그리고 정작 리어왕을 광야로 내쫓고 그 모든 도전을 물리친 고너릴은 리어의 거짓말에 속아 옥새를 찾아 뒤주로 들어갔다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는다(이 부분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역사적 모티프를 빌려온 것).
결국 권력도 사랑하던 딸들도 모두 잃어버린 리어의 울부짖음과 아버지 그로스터를 잃고 동생마저 찔러죽이게 된 에드거만 남게되는 죽음의 서사극.
연극을 보며 내내 생각하게 된다.
고너릴이 아버지 리어를 비롯하여 리건, 코델리아, 에드먼드 등을 죽이고 얻고자 했던 가치는 무엇인가. 귀족의 영영속적 지위 아래 있는 세계를 개혁하려한 것이었나. 오로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는가. 서자로 느끼는 모순은 마치 홍길동의 모티프를 보는 듯 하였으나, 형 에드거를 몰아내고 아버지 글로스터까지 죽여가면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개혁은 역사가 수용할 수 있는 개혁인가.
무엇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누리고 지키면서, 마치 조물주처럼 세상을 주제할 수 있다고 과신하던 리어의 권력 이양과 세대 교체 방법은 타당한 것일까. 아무것도 내어 놓지 않으려 하면서도 마치 모든 것을 딸들과 세상 베푼다는 식의 권력 교체가 결국은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모두를 잃은 리어는 무엇을 얻었는가. 에드거와 리건은 또 어떤가.
남의 삶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이런 ''훈수''가 가능하다. ''그렇게 해서 너는 무엇을 얻으려는가. 이 어리석은 욕망의 화신들아.''라고. 그리고 연극이 끝나면 이제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러면 너는?''

변화의 변증법
극 속 대사 중에는 곱씹어 볼 말이 있었다. ''우유가 썩으면 곰팡이가 되기도 하지만, 치즈가 되기도 한다.''(뭐 이런 내용의 대사가 두어 번 나온다) ''변화''는 피치 못할 자연의 섭리지만 그것이 어떤 변화인가 하는 것은 이간에게 달렸다는 것으로 읽어 낼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아름답게 순환하는 자연의 변화를 따르지 않고 인간의 잣대로 욕망을 과도하게 들이댄다면 그 변화는 비극과 파멸이라는 질적 전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과 그들의 세계가 어찌 섭리에 순종하기만 해왔단 말인가. 욕망에 눈이 멀게 되면 필연적으로 제 자리를 영원히 누구에게도 내주려 하지 않고 다른 것은 변하더라도 자신의 기득권만은 영원히 더 번성하리라고 믿게 되기에 비극의 역사도 함께 이어져 오지 않았던가. 섭리를 순종하든 거역하든, 어떤 모습으로 전화하든 변화는 언제난 변증법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알고도 모르고 있었을 뿐.

양면성과 딜레마
그러기에 인간은 알고도 아는 대로 실현하려 하지 않고 욕망인지도 모르는 거대한 욕망과 손을 잡는다. 내어 주어야 함을 알지만 내어주지 못하는, 목적처럼 과정도 정의로워야하지만 결과를 위해 정의롭지 못함과 타협하는 딜레마. 리어와 고너릴, 그리고 에드먼드가 이 연극 ''리어는''에서 온몸으로 보여준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아름다운 뒷모습
연극 속에 등장하는 ''작가''는 극을 안내하고 해설도 하면서 시 한 편을 낭송한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형기의 ''낙화''.
시집이나 문학 교과서에서 볼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온몸으로 시가 파고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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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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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
원작 ''리어왕''이 정밀한 정보와 충실한 제시가 있는 ''핫 미디어''라면 ''리어는''은 무척 제한된 소극장에 최적화된 ''쿨 미디어''다. 리어왕의 서사를 중심으로 사도세자, 홍길동, 캔디의 모티프가 적절히 가미되어 변주된다. 앉아 있는 내내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리어는''이 간략히(?) 제시하는 알레고리에 집중하지 않으면 자칫 관객이 소외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쿨 미디어'' 연극이다. 공연 내내 ''리어는''과 우리나라의 현실, 그리고 나의 삶을 들락거리며 생각하게 한다. 무엇을 움켜쥐고 변화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느냐고.

덧.
1. 관객의 코앞에서 펼쳐지는 에드먼드와 에드거의 결투 장면은 실감 그 이상의 매력이다. 서양 칼싸움 보다가 아슬아슬해서 죽는 줄 알았다는.
2. 인터파크 감상평은 짧게 써야 한다. ㅠㅠ 다 쓰고 확인 눌렀다가 로그인 세션이 날아갔다는.
3. 다음부터는 다 더먹여주고 웃겨주고 감동도 주는 핫미디어 연극만 밝히지 말아야겠다는 반성^^

이번 ‘리어는’은 교육극단 ‘푸른 숲’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동안 ‘개순이’ ‘개미’ ‘사흘’ 등이 ‘지금 여기’ 우리의 비근한 일상과 현실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들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두고두고 곱씹어 보게 했다면,
이번 공연 ‘리어는’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끌어와 인간의 심층에 자리잡은 권력과 욕망이라는 묵직한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작품의 색깔이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는 것.
성공여부를 떠나 이같은 시도에 대해 일단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떠오르는 대로 인상적이었던 것 몇 가지.
첫째,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라는 세계의 드넓고도 깊은 아름다움이 올연히 살아 있는 무대엿다는 것만으로도 볼 만한 가치가 었었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
둘째,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원작을 우리의 역사적 사건과 접합시킴으로써, 누구나 쉽게 빠져들 수 있는 뜨겁고 격렬한 드라마로 변모시켜 놓았다는 것. 물론, 이 과정에서 얻은 것이 있는 만큼, 잃은 것도 있겠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지만^^.
셋째, 뛰어난 대사 전달력과 감정 표현은, 대부분 교사들로 이루어진 이 극단 배우들의 명백한 장점이자 특징 중 하나라 할 만하다는 것이다. 특히나 이 작품은 연기를 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는 것.
넷째, 무대나 조명 등도 심플하면서도 상징적으로 접근해 전체 이야기 구조나 연기의 패턴 등과 멋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리어왕’을 다시 꺼내 읽어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켰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작업이었다는 생각이다. 앞으로도 어떠한 틀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시도들을 통해 스펙트럼을 넓혀가면 좋겠다. ‘푸른 숲’이 늘 푸른 빛으로 매년 공연을 올리고, 그 공연을 볼 수 있어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참 행복하기 그지없다. 힘내요, ‘푸른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