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스토리가 복잡하긴 하지만 재밌었습니다.

하고 싶었던 말이 너무 많았던 것 같다.
쓸데없는 장면들이 많이 보였다.
잦은 암전이 집중력을 떨어뜨렸다.
특히 마지막 장면 연출은...좀.......진지한 장면에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내용인즉슨 삼국유사가 아니라 삼국사기였다.
역시 경애왕-경순왕-마의태자-신라멸망은 우리 역사 스토리텔링의 중요한 보고이다.
그러나 경애왕 동생의 급작스런 자살로 경순왕 김부의 음흉한 권력욕을 볼 수 있었던 드라마틱한 기회를 날려버렸다.
전체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연극에 비견되는 스토리였다.
그러나 구성이 좀 산만한 느낌을 주었다. 작가가 좀 더 완벽한 작품을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정보석의 연기력과 스타성이 이 연극을 성공시키는 데 일조 하였다.
그리고 목소리가 구성진 몇몇 연기자가 마음에 든다.

<멸>은 내내 고민하면서 보게 되는 작품이다.
즉흥적으로 즐기고 그 텍스트에 푹 빠져드는 즐거운 작품도 있지만
<멸>은 꽉 채운 2시간 내내 무대가 아니라 내 현실을 머리가 아프도록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자면 신라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를 그 핏빛 사건이
어째서 현재의 여러 사건들과 그토록 닮아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고로 역사는 무한히 반복되고, 권력을 가진 자와 권력을 가지려는 자의 더럽고 치졸한 싸움은 계속되며,
그 주변을 둘러싸고 얼마나 많은 희생이 뒤따르게 마련이라는 것,
무엇보다 개싸움을 왜 나는 언제나 이렇게 무기력하게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가
하는 생각도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빼앗고 지키려는 김부를 연기한 정보석의 연기는 정말 좋았다.
티비 속 탤런트의 모습 때문인지 처음에는 거슬리기도 했으나
중반의 비열하고 자신만만한 왕의 모습부터 국운을 다한 나라의 왕으로서의 조바심과 불안함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별로 멋있지 않은 악역이 그의 카리스마 때문에 빛난 것 같다.
살짝 짚고 가고 싶은 것은 내가 이 극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생각한 김일이다.
정의롭지만 너무 나약하기 때문에 결국 엄마나 신력에게 의지하고 마는 그는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런 다면적인 김일의 모습을 표현하기에는 배우의 연기가 좀더 섬세하고 다층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다만, 목소리는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이야기는 꼭 하고 싶다.
여성의 역할이 크지 않은 연극이지만 나름 여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낙랑의 연기는 정말 못 봐 줄 정도였다.
극이 마지막으로 치달아갈 때 김일과 도주했다가 김부를 마주친 그녀가 울면서 사라지는 장면은 어이 상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과장된 제스처와 어조로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는데 끝까지 그 연기에 설득력을 주지 못했다.
분방해서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닌 낙랑을 약간 정신이 아픈 캐릭터로 해석한 게 아닐까 싶었다.
텍스트를 전혀 읽어내지 못한 그녀의 연기는 보는 내내 실소와 탄식을 자아내게 했다.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지만, 그녀 때문에 한 개는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하는 게 좀 아쉽다.

어쨌거나 연극을 감상하며 여러모로 골치를 앓고 나온 후, 나는 좀 씁쓸해졌다.
이야기는 재미있었고, 구성도 짜임새 있었으며,
무대의 활용이나 마지막 연출도 아주 흥미로웠다.
아주 장점이 많은 작품이었다. 그런데 왜?
김부가 아닌 김일을 더 열심히 설명하고 조명해준 걸 보면 작가나 연출가는 좀 착한 사람일 것 같았다.
그러나 신라와 김일이 맞이한 비극적 운명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는 생각에 쓰게 웃었다.
착한 사람은 싸움을 싫어하고, 그래서 양보라고 생각하며 타협하니까.

대선이 다가오고 있다. 언제나 비겁했던 나도 이번엔 내 표를 행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