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재밌었어요

바른 말을 하는 이를 탓해야했던 그때 그 시절.
상황에 따라 거짓말도 할 수 있는건데 왜 너만 그래, 하는 인간의 간사함과 이기심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불편했던 이야기.
하지만 무대와 배들의 연기는 정말 좋았다.

좀처럼 무대나 매체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이창동 소설이 연극으로 각색된다는 것은 호기심이 이는 요소이지만 두산인문극장 같은 안정적인 기획에 연계되지 않았다면 관람으로 이어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창동의 소설가 이력이 길지 않아서 작품이 많지도 않지만 소설가 시절 발표한 작품이 연극으로 각색된 것도 이번 [녹천에는 똥이 많다]가 처음인것 같다. 이전에도 이창동의 소설이 무대화 된 적이 있었나 알아봤는데 공연 연혁이 없다. 이창동이 극단 출신인걸 떠올렸을 때 연극쪽과는 의외로 연결 고리가 짧은 것 같다. 명성을 안겨다 준 영화 연출작들도 영화 각색물이 많은 공연쪽에서 무대극으로 각색된적이 없다.



이번 [녹천에는 똥이 많다]는 극단 아어 대표이기도 한 윤성호가 각색했다. 소설가 시절의 이창동 작품을 무대로 끌어 올렸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고 그런만큼 문예물에 무게를 두었다. 신유청 연출은 [녹천에는 똥이 많다]의 전개 방향을 소설의 무대화로 잡은 것 같다. 문예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원작 존중의 태도가 극 전반을 지배한다. 극은 문학을 각색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며 영화 감독으로 더 유명한 이창동의 과거 직업을 환기시킨다.



극이 궤도에 오르기까지 대사보다 설명이 더 많다. 소설의 지문을 배우들이 그대로 읽으며 낭독 공연처럼 전개되고 있는데 초반에는 대사나 움직임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까지도 낭독 공연 형식을 빌려서 지친다. [녹천에는 똥이 많다]가 낭독 공연 형식을 써야할만큼 지문의 구성이 독특한 것도 아니고 문학적으로 대단한 명성을 쌓은 것도 아닌데 거장 대접을 받고 있는 이창동의 소설가 시절 작품을 무대극으로 풀어낸다는 부담감에 공연의 형식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소설에 눌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정도로 낭독에 중점을 둘거였다면 사전에 읽는 공연임을 공지했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불만이 쌓일 즈음에 다행이도 앙상블이 쉴새없이 지껄여대는 낭독은 각 장면 전환에서 필요할 때만 쓰이고 드라마의 방향을 잡는다. 인물의 감정은 배우의 연기로, 각종 지문은 대사로 풀이된다.




난개발로 몸살이 난 1980년대 서울 변두리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급격한 도시화에 내몰린 인간 본성을 탐구한다. 주인공은 사립 고등학교 급사에서 교사로 신분 상승한 30대 후반의 인물로 충동적으로 자신과 결혼한 아내와 모든 면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이복동생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다. 안정된 중산층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양심과 자존심을 버리고 23평짜리 아파트 공간을 방패삼아 비겁하게 움추러든 주인공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삶에 침투하다시피 들어온 이복동생의 등장으로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던 일상에 균열이 생긴다. 운동권으로 수배중인 명문대 출신 동생은 당당하고 사려깊으며 똑똑하다. 이복동생의 등장으로 주인공은 가난에 시달렸던 어린 시절과 현재를 오가며 심리적으로 방황하고 아내와의 건조한 관계에도 금이 간다.



배역 설정이나 구성 자체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힘을 느끼긴 어려웠다. 이창동의 이름을 지우고 접근하면 시대착오적인 소재 차용으로 보일 지경이다. 인물 설정도 낡았고 시대의 모순에 갇혀 행동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고뇌와 일탈, 방황, 자아 성찰은 운동권 후일담 소설처럼 때가 묻은 자기 연민으로 점칠될 뿐이다. 1992년이라면 공감과 위로가 됐겠지만 2019년의 시간에서 보는 [녹천에는 똥이 많다]는 감상주의적인 측면이 더 많이 보인다.



각박한 사회에서 살기 위한 본능으로 발버둥치는 소시민의 불안감과 소외감, 상실감 등은 어느 시대에나 일상적으로 부딪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작품에 공감할 요소를 찾을 수 있겠지만 [녹천에는 똥이 많다]의 성질 자체가 굉장히 철지난 수법이라서 재해석의 모험을 부리지 않는 이상 지금 보기엔 낡았다. 연극은 이창동의 명성에 눌려 낭독 공연 형식을 빌린 문예물로 가고 있어서 과연 이것이 2019년 초연된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의 투박한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소재나 배역의 성격이 1980년대를 회고하는 1992년의 시점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상화된 여주인공의 욕망과 위선도 지금 보기엔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



낡은 원작의 한계를 탈피하는건 배우들의 열연과 숨막히게 조이는 고층 아파트의 콘크리트 질감을 시각적으로 이해시키는 무대 장치이다. 젊은층에서 특히 선호하는 레트로풍 감성의 인더스트리얼 카페 내부를 보는 것 같은 무대인데 두산인문극장의 2019년 아파트 주제와도 잘 맞고 작품의 목적에도 효과적으로 부합한다. 아파트 주변 녹천에 고인 똥과 난개발의 흔적을 드러내는 흙밭도 급격한 도시화가 일으킨 후유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세련된 무대 구성력과 배우들의 열연이 철지난 원작의 한계를 이겨냈다. 깨져버린 거울, 죽은 물고기, 어항, 흙가루 등 상징이나 은유의 방식도 시대에 갇혀 버린 고물에서 옛작품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던건 그만큼 배우들의 연기와 무대 장치에서 소생시키는 힘이 일정 부분 발휘했기 때문이다. 낭독 공연 형식이라도 빌려서 문예물에 무게를 둔게 현명한 선택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개성이라도 없었다면 딱 1992년 시점에서 정체된 인물과 이야기만 남아 시대착오적인 고뇌로 범벅됐을 것이다.

기대한 만큼 멋진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