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두 번의 연재를 통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역사 깊은 뉴욕의 두 극장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이번은 마지막 회로 오늘도 역시 극장과 그 주변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소개해 드릴 극장은 역사 깊은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단명한 극장이라고나 할까요?

2005년 봄, 극장이 들어서기에는 삭막한 지역에 새 극장 건물이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거리상으로는 브로드웨이 극장가 근처이긴 하나 접근성은 한참 떨어지는 곳이었죠. 주변풍광은 기가 막힐 정도였습니다. 주변에는 뉴저지로 가는 링컨터널 입구와 기찻길이 교차하는 건 기본이고 창고들이 즐비해있질 않나, 지하철역은 너무 멀고 버스도 한 노선밖에 없어서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에는 참으로 불편합니다.

고급 콘도가 길 건너에 들어선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공사중이었고 길가에 생수하나 사러 갈 구멍가게도 아직 없는, 마치 우리나라에서 이제 막 입주를 시작한 기반 시설이 부족한 어떤 신도시를 연상시키는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5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삭막한 여건은 거의 변한 게 없습니다. 콘도가 거의 완공을 앞두고 있다는 점만 빼고는)

하지만 이 소규모 멀티플렉스 공연장(37 Arts)은 당시 업계 관계자들, 특히 프로듀서들에게는 비상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습니다. 왜냐면 브로드웨이에서 <렌트>, <애비뉴 큐> 등 젊은 취향의 작품을 제작한 제프리 셀러와 케빈 맥컬럼이 주축이 된 프로듀서 그룹이 이 극장을 예술적인 완성도가 높은 신작 뮤지컬을 지속적으로 개발하는 전진 기지로 삼겠다는 포부를 밝혔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과 함께 이 극장의 운명을 분담한 또 다른 거물이 있었으니, 바로 자신의 이름을 딴 비영리예술단체를 운영하는 무용가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였습니다. ‘상업’과 ‘예술’을 한 지붕 아래서 공존시키려는 이들의 실험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새 극장이지만 상업적인 프로그래밍을 하다보니 초연작을 올려야한다는 부담감은 없었나 봅니다. 그래서 이 극장의 공식적인 개관작은 에단 호크가 처음으로 오프 브로드웨이에 출연한 연극 <훌리불리>가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42가의 다른 극장에서 초연을 한 뒤 흥행에 성공을 거두자 이곳으로 옮겨져 공연했는데 평단으로부터는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극장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결정적으로 이 극장의 존재감을 널리 알린 공연이 나왔습니다. 2006년 5월, 여기서 초연을 올렸던 뮤지컬 <인더 하이츠>(In The Heights)가 곧바로 브로드웨이로 옮겨가 토니상을 휩쓸면서 대박을 터뜨렸기 때문이었죠. <인더 하이츠>는 이 극장 안에서 가장 객석 수가 많은 극장(Theater A, 499석)에서 공연을 올렸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 극장의 객석 숫자는 브로드웨이 극장들의 절반도 안 되지만 무대의 넓이는 비슷한 정도로 커서 대극장 규모의 작품도 올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2007년 가을에 제가 한국의 극장 관계자분들에게 뉴욕 극장가를 소개하고 함께 견학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때 방문지 중 하나로 이곳을 선택했습니다. 비영리단체인 경우 보통 예술감독이 극장을 대표하지만 이곳은 대관과 운영을 총괄하는 댄 마클리 씨가 저희 일행을 맞아주었고, 청바지 차림으로 손수 5층으로 된 건물 안에 있는 3개의 극장과 4개의 연습실을 전부 다 구석구석 안내해주었지요. 그러다보니 극장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 기술적인 단점이 많이 보였습니다.


좁은 길 안의 양 옆의 건물 사이에 꼭 끼어있던 건물을 사들여 재건축하다보니 극장이라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장비 반입구(Loading Dock)도 없어서 세트를 다 잘게 쪼개서 정문 로비로 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인더 하이츠>처럼 극장의 공동 소유주가 직접 제작하는 작품이 아니고서는 다른 제작자가 이곳을 대관해서 초연을 올리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겠다 싶더군요. 그때 공연 중이던 뮤지컬 <프랑켄슈타인>를 관람했는데 반입의 어려움 때문인지 단촐한 세트에 프로젝션 영상으로 대체하여 지나치게 허접한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오지랖 넓게도 이 극장이 <인더 하이츠> 이후에도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했네요.

그로부터 2년 후, 결국 '37 아츠'의 간판이 바뀌게 됩니다. 2008년 10월, 그동안 이 건물의 위층을 쓰고 있던 바리시니코프 아트센터(The Baryshnikov Arts Center, BAC)가 세인트 루크 오케스트라(Orchestra of St. Luke)와 공동으로 이 건물을 통으로 매입한거죠. BAC는 1979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발레리노, 영화 ‘백야’의 주인공)가 설립한 비영리 무용재단으로 이 극장 개관할 때부터 3층을 사용해왔습니다. 주인이 바뀐 이유는 역시 의욕을 가지고 시작했던 상업 프로듀서들이 극장을 상업적으로 유지할 만큼의 충분한 관객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관객들이 슬슬 극장의 이름을 기억할 무렵 간판이 내려지게 된 것이죠.


하지만 매각이 이루어지기 한 달 전인 2008년 9월, 이곳에서는 또 하나의 명작 뮤지컬이 잉태되었는데, 바로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안무가 빌 T. 존스의 뮤지컬 연출 데뷔작인 <펠라!>(Fela!)입니다. (이 작품은 올해 토니상에서 11개 부문 후보로 올랐으며 가장 유력한 뮤지컬 작품상 후보입니다.) 마지막 불꽃은 강렬했군요.

이제 새 주인 BAC는 2010년 2월, 3층의 Theater C를 리노베이션을 거쳐 제롬 로빈스 시어터(299석)로 재개관했습니다. 음악, 연극, 영화, 시각예술을 망라한 실험극 크리에이터들의 개발 공간으로 규정한 공간입니다. 소호에서 잔뼈가 굵은 우스터 그룹이 하우스 극단으로 자리잡고 지난 3월, 제임스 스트라스가 1982년에 쓴 풍자극이자 영화 ‘파고’로 잘 알려진 프란시스 맥도먼드 주연의 실험연극 <북대서양>(North Atlantic)을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제목에서 뭔가 느껴지지 않나요? 모든 면에서 반대되는 작품이 현재 뉴욕에서 공연되고 있으니까요. 바로 뮤지컬 <남태평양>입니다.


뮤지컬↔실험극, 남↔북, 태평양↔대서양, 해군↔공군... 전위적인 작품 내용만큼이나 리노베이션을 마친 이 극장의 좌석 배치도 엽기적이었습니다. 1층 중간부터 무대 앞쪽 바닥이 관객 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는데다가 2층 좌석은 무대 조명기보다 높은 곳에 매달린데다 가파르기까지 한 경사여서 배우의 얼굴은 고사하고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아찔합니다. 제가 공연을 본 날은 카드결제기도 고장이 나서 손으로 팩스를 써서 결제를 요청하는 모습을 보았는데요, 사실 직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순수한 예술집단의 기운이 넘치는 사람들이더군요.

이 공연만으로도 ‘37 아츠’ 극장은 확실히 역사 너머로 사라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셀러씨, 맥컬럼씨 대체 무슨 짓을 한겁니까!!! 대부분의 공연 프로듀서들은 극장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것을 자신의 꿈을 구현하기 위한 중요한 단계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극장을 가지고 있으면 대관 걱정을 덜 수도 있고 그 공간에서 작품 개발과 트라이아웃까지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겠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가 않습니다. 제 아무리 고정지출비용을 줄이기 위해 변두리에 극장을 지었다고는 해도 한 공간이 영리/비영리를 동시에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꿈은 꿈인가 봅니다. 상업 프로듀서와 비영리 예술가가 한 공간에서 만나 이루고자 했던 시도는 2년 반 만에 끝났지만 그 동안의 노력이 헛되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부러울 뿐이지요.

더하기 하나!

이 극장에서 공연을 보려면 식사 계획을 잘 세워야 합니다. 조금만 서둘러서 나온다면 오히려 다른 곳보다도 더 진수성찬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곳은 헬스 키친(Hell’s Kitchen) 지역이거든요. 대략 남북으로는 34가에서 50가 동서로는 9애비뉴부터 서쪽지역을 말합니다. 타임스퀘어와 브로드웨이 극장가가 입주해 있어서 유동인구가 많고 공연업계 관계자들도 많이 삽니다. 특히 앙상블 배우들은 뉴욕에서 일자리가 있는 동안은 룸메이트를 구해서 지내곤 하는데,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역도 바로 이곳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지역은 한 때 엄청난 우범지대였습니다. 특히 36가에서 41가 사이에는 버스터미널, 터널입구, 거대한 창고들이 즐비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라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도심 속의 버려진 구역이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도심재개발 사업으로 부동산가격이 폭등하자 고급 콘도미니엄 건물이 하루가 다르게 경쟁적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경제위기로 부동산가격이 다시 폭락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그 자리에서 살던 사람들이 다시 입주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헬스 키친은 그저 쉬크한 동네 이름으로 변모했을 뿐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헬’은 사라지고 있지만 ‘키친’은 장족의 발전을 거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9애비뉴 42가에서 50가 사이에는 주말이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맛집이 즐비합니다. 그런데 가격은 미드타운이나 빌리지에 비해 매우 저렴하다는 점이 매력이죠.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브로드웨이 공연을 보고 네온사인에 홀려 타임스퀘어 주변의 비싸고 맛없는 바를 찾지만 뉴요커들은 극장가 불빛을 뒤로한 채 조용한 10애비뉴 길가에 숨어있는 그들만의 공간을 찾습니다.

Baryshnikov Arts Center (37 ARTS)
450 West 37th Street
Box Office 212-560-8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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