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즈’ 다들 아시죠? 저에게는 현실감 넘치게 뉴욕 구석구석을 안내해준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절대 유명한 관광지가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마치 관광객이 많은 뉴욕에서 관광객을 피해 현지인들이 따로 만들어 놓고 자기네들끼리만 즐기는 피난처와 같은 명소들이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프렌즈>에 나온 이상 또 다른 관광지가 되는 걸 피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죠.

1997년 ‘프렌즈’ 시즌3에서 조이가 연극배우로 극장 무대에 출연한 에피소드를 기억하실런지. 그 에피소드 제목은 ‘The One With The Screamer’인데, 벤 스틸러가 레이첼의 남친 토미 역으로 등장하기도 했죠. 이번에 소개해 드릴 곳은 바로 그 극장, 오프 브로드웨이의 안방마님격인 루실 로텔 극장(Lucille Lortel Theatre)입니다. 그 에피소드에서 무대 연출가는 극장 이름을 정확하게 언급하기도 합니다. 애당초 ‘프렌즈’는 뉴욕 현지 촬영도 많고 대사 중에서 고유명사가 난무하기로도 유명하죠.

루실 로텔 극장은 그리니치 빌리지 서쪽 크리스토퍼 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53년 6월 9일에 시어터 드 리스(Theater de Lys)라는 이름으로 개관했었죠. 당시만 해도 브로드웨이를 벗어난 곳에서 공연장이 뿌리내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개관 첫해에는 흥행작도 없어서 유명무실 사라지나 싶더니 이듬해 드디어 대 히트작이 나오게 됩니다. 바로 쿠르트 바일 작곡, 베르톨트 브레히트 대본의 <서푼짜리 오페라>(The Threepenny Opera)였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뮤지컬이긴 해도 전통적인 브로드웨이 작품과는 색깔이 다릅니다. 오히려 실험이 가능했던 오프 브로드웨이에 더 어울리는 작품이지요. 게다가 여주인공 제니 역에는 쿠르트 바일의 부인이자 1928년 독일 초연부터 무대에 섰던 전설의 로테 레냐(Lotte Lenya)가 출연해서 큰 화제가 되었고 오프 브로드웨이 프러덕션임에도 불구하고 1956년에 토니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엄격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 공연은 장장 7년 동안 2,707회 동안 계속됩니다.

한편 1955년에는 배우 겸 프로듀서였던 루실 로텔이 이 극장의 새 주인이 됩니다. (엄청난 부자인 남편이 준 결혼 1주년 선물이었다는군요!) 그리고 1981년 그녀의 이름을 따서 개명을 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뉴욕에는 그리니치 빌리지를 사이에 두고 이스트 빌리지와 웨스트 빌리지가 있는데, 거리는 도보로 10분 내외에 불과하지만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이스트 빌리지는 쉽게 말해 인터내셔널, 흑인문화, 캘리포니아 히피, 펑크록 등이 뒤섞여있는 곳입니다. 강한 이미지에 대학가와 가까워서 길가에 사람도 많고 소음도 심하고 저렴한 식당도 즐비합니다. 이곳의 복잡다난한 특징을 공연예술로 반영한 극장이 바로 퍼블릭 시어터(Public Theater)라고 할 수 있겠죠.

반면 웨스트 빌리지는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을 떠나 우아하게 즐기고자 하는 여피족들의 본거지입니다. 록음악은 찾아보기 힘들고 수준 높은 재즈 클럽, 유럽 연극, 평화로운 게이 커뮤니티, 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한 여성적인 공간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다소 투박한 외관을 한 전통의 루실 로텔 극장이 있습니다. 이 극장을 중심으로 반경 500미터를 마음껏 걸어보세요. 다른 곳에서는 잘 마주칠 수 없는 잘생긴 미남 커플들이 당신을 유유히 스쳐지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겠죠.

그동안 루실 로텔 극장에서 많은 작품을 관람했는데 대부분 정통 연극이었습니다. 이 극장은 현재 맨하튼 클래스 극단(MCC Theater)에서 시즌제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1986년에 창단된 이 극단은 그동안 퓰리처상을 받은 <위트>(Wit), 토니상 수상작 <프로즌>(Frozen) 등을 제작한 수준 높은 단체입니다.

평소에는 정통 연극을 주로 공연하지만 여름 시즌에는 달라집니다. 대부분의 극단과 배우들이 휴가를 떠나는 여름방학 기간에는 비영리 어린이 공연단체의 뮤지컬을 올리기도 합니다.

물론 작품 선정은 매우 까다롭습니다. 작품이 좋을 뿐만 아니라 연출, 배우들의 연기, 무대 등 한 마디로 프로덕션의 완성도가 보장되지 않은 작품은 올리지 않습니다. 때문에 비록 어린이 뮤지컬이라도 많은 성인들이 어린이들 틈에 끼어 한낮에 티켓을 구하기 위해 뻘쭘하게 줄을 서는 모습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그 어른들 중의 한 명이었네요.

가장 최근에 막을 내린 작품은 <더 프라이드>(The Pride)라는 연극입니다.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 그동안 이곳에서 관람했던 어떤 작품보다도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더 프라이드>는 지난 2008년 12월 런던 로열코트 시어터 소극장에서 초연을 가진 작품으로, 작가 알렉시 카이에 캠벨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연극은 이미 2008년 런던 비평가상 신인극작가상을 수상하긴 했지만 그건 대본이 받은 상이었고, 공연 자체는 불과 2주 반에 불과했기 때문에 기억 너머로 사라질 수도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MCC가 이를 과감히 뉴욕에서 올리기로 결정하고 그야말로 휠씬 완성도가 높고 공들인 프로덕션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출연진 또한 매우 화려합니다. 배우들은 모두 영국에서 데려왔고 연출가는 토니상 트로피가 있는 조 만텔로인 데다가 조명 디자인은 토니상 트로피의 숫자를 세기가 어려운 폴 갈로, 무대 디자인은 데이빗 진입니다. 무엇보다도 남자 주인공이자 옴므파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올리버 역에는 영화 ‘향수-어느 살인자의 추억’에서 주인공인 그루누이를 맡았던 벤 위쇼가 맡아 열연을 보여주었죠. 필립 역에는 영화 ‘쇼퍼홀릭’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영국의 훈남 배우 휴 댄시가 출연하고요.

배경은 1958년과 2008년의 런던입니다. 배우들은 1인 2역을 하며 50년의 간극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동성애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히지 못하고 자아를 부정해야 했던 어두운 시대인 1958년과 게이 프라이드 축제가 열리고 자유를 만끽하는 2008년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보여집니다.

두 게이 남자(부동산 업자 필립과 젊은 작가 올리버) 사이에 놓인 여자(실비아)는 1958년에는 필립의 아내로서 그 고통을 감내하지만 2008년에는 게이 친구를 둔 쾌활한 여자 친구로 변모합니다. 이 작품에서 올리버는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하나의 인물을 연기합니다. 1958년에는 필립을 사랑하는 지고지순한 인물이지만 2008년에는 섹스에 탐닉하는 쾌락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필립 역의 휴 댄시도 물론 잘하지만 그 상대인 올리버 역의 배우 벤 위쇼는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매력을 보여줍니다.
사실 벤 위쇼가 ‘향수’에 캐스팅되었을 때 다른 곳은 몰라도 한국의 팬들은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 신인이라고 난리가 났었죠. 하지만 저는 너무 잘생기지는 않은, 한 대 맞은 듯한 그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실 ‘향수’는 원작이 너무 강렬해서 누가 그 역을 맡아도 각자의 머릿속에 있는 장 그루누이와는 거리가 있을 수 밖에 없었죠. 저 역시 그랬구요.


하지만 스크린이 아닌 무대에서 그것도 런던이 아닌 뉴욕 무대에 데뷔한 그를 본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객석에는 그를 보려는 동성애, 이성애자 관객들이 가득 했고 지난 겨울에 개막한 이 작품은 폐막일이 연장되어 올 봄까지 2개월 동안 공연되었습니다. 이 극장의 주변에는 유명한 맥널티 커피를 비롯해 다양한 무공해 샐러드 레스토랑과 공정무역 커피 하우스 등이 즐비합니다. 평화를 지향하는 그들의 성향 때문이겠죠. 하지만 가끔 한국 사람이라면 깜짝 놀랄 수도 있는 엽기 섹스숍도 있으니 수줍은 척 들어가서 한 번 구경해 보시죠?


더하기 하나!
공연을 보고 이글을 쓰는 사이에 올해 오프 브로드웨이 공연을 대상으로 시상하는 루실 로텔 어워즈 후보가 발표되었는데 정작 벤 위쇼가 남우주연상 후보에 빠져서 극단 홈페이지에 많은 항의 댓글이 올라오고 있네요. 나머지 세 배우는 모두 후보에 올랐는데 말이죠. 물론 모든 배우들이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

MCC Theater @ The Lucille Lortel Theatre
주소 : 121 Christopher Street, New York, NY 10036
(지하철 1, 9, Path 노선 Christopher Street)
전화 : (212) 727-7722
홈페이지 : http://www.mcctheater.org/index.htm

사진: MCC Theater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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