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는 창작예찬 공연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이윤택은 이 작품을 두고 “연희단거리패를 살려 준 작품”이라고 극찬해 마지 않았다. 그와 멀찍이 앉은 한 터벅머리 총각이 이 말에 머리를 긁적일 때만도 곧이어 세상을 맞을 숨막히도록 빈틈없이 다져진 내공의 작품을 예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4시간 30분의 공연시간으로 먼저 이야기 된 연극 <원전유서>가 세상에 등장했다. 두 번의 인터미션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공연은 각각 2시간씩의 전막과 후막, 그리고 그 사이 간단히 요기라도 할 수 있는 30분의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애초 8시간 넘는 길이를 쳐내고 다듬어 만들었다지만 웬만한 다짐으로는 범접하기 힘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공연 중 지루함을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원전유서>에서는 쓰레기 매립지에 사는 주소 없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생과의 사투를 벌인다. 힘의 논리로 이들을 제압한 악의 근원 우출이와 남편을 빼앗기고도 폭력을 그대로 감내하는 어진네, 유령인 듯 오가는 치매 노인들과 이들에게 주소를 주고자 하는 지식인 남전의 몸부림은 수 많은 수사와 사유 끝 찬탄으로 순간을 기록한다.

하지만 ‘쓰레기도 돈이 될 수 있다’는 말에 갖은 자들은 악취 나는 쓰레기 더미를 뒤집어 주머니를 채우면서 더한 악취를 만들어 낸다. 서로의 옷가지까지 벗겨내어 결국엔 벌거벗은 나체로 황급히 자리를 뜨는 사람의 모습은 실상 이들 전부의 모습일 것이다.
살기 위해 우는 연습을 하는 어린 어진이와 글자 모르는 어미 앞으로 기억, 니은의 편지를 남길 줄 아는 어동이. 이들의 죽음이 싹 틔운 한 그루의 나무와, 어진네가 묵묵히 피흘리며 흙을 일군 곳에서 고개를 내미는 푸른 상추는 과거가 미래를 위해 이룩한 희망의 거름이다.

공연 시간 뿐 아니라 쉽사리 무언가를 연상할 수 없는 제목, 그리고 공연인이라면 누구나 빈손으로 입장 가능하다는 제안 등 이 작품은 ‘흥행’을 일찌감치 안중 밖에 두었다. 하지만 무대 끝에 객석의 기립박수는 여지없이 터지며 <원전유서>가 오늘날 대학로에 던지는 쓰고도 강력한 펀치를 보여준다. 공연 산업의 활성이 아닌, 공연계, 연극계의 질적 성장을 과감히 이끌어 낸 이 작품은 가문 대학로에 내리는 감사해 마지 않는 단비인 것이다.

무엇보다 사유로 가득 차 귀가 황홀한 대사들과 이치의 정통을 꿰뚫는 유기적인 은유 등으로 시대를 이끌 젊으나 묵직한 극작가 김지훈의 발견이 큰 수확이다. 공연 후 배우들 인사 마지막으로 “<원전유서>의 김지훈 작가를 소개합니다”에 힘차게 걸어나와 담담히 인사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이 작품이 무엇보다 작가를 위한 박수의 무대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희곡이 실린 책자 앞에 작가의 글 한 구절을 남겨본다.
“내 담론의 나무들을 두고서는 그 어떤 서사의 땅도 밟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글: 황선아 기자(인터파크INT suna1@interpar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