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모두에 외면 당한 비극적 운명

연극 ‘한씨연대기’(연출 김석만ㆍ황석영 작)는 동숭아트센터와 문화창작집단 ‘수다’가 2004년 한 해 동안 진행하는 ‘연극열전’ 개막작이다. ‘연극열전’에서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은 15개의 작품이 차례로 공연된다.

‘한씨연대기’는 극단 연우무대가 황석영의 소설을 각색해서 무대에 올린 것으로 1980년대 당시로는 생소했던 ‘역할 바꾸기’라는 새로운 형식의 연출법을 선보인 수작(秀作)이다. 또 한씨라는 인물의 개인사를 통해 우리들의 일그러진 현대사를 재조명한 화제작이었다. 이는 1985년 초연 당시 잡지 ‘객석’에 실린 연극평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일성대학 의대 교수의 비극적 삶

6ㆍ25 전쟁이 시작되기 전 김일성대학 의학부 교수로 일했던 한영덕(강신일 분)은 전쟁이 터지자 중앙인민병원 특병동에서 근무한다. 그는 의사로서의 자부심과 양심이 강한 사람이었기에 항상 당과 심한 의견대립을 보인다.

결국 한영덕은 친구 서학준(이대연 분)의 도망을 방조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지지만 확인 사살을 제대로 못한 인민군의 실수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아내와 헤어져 홀로 월남한 그는 남한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는 친구 서학준을 통해 자신보다 먼저 월남한 여동생 한영숙을 만난다. 여동생의 집에 얹혀 살면서 무면허 의사 박가(김중기 분)와 내키지 않는 동업을 시작한 한영덕은 박가의 실수로 낙태수술 중 환자가 죽자 직장을 옮기고 다방마담 윤미경과 재혼한다.

곧이어 의료감시원이 박가 병원의 불법영업을 적발하자 박가는 한영덕이 불법영업을 고발한 것으로 오해하고 보복을 하기 위해 정보당국에 한영덕을 간첩혐의로 고발한다. 수사기관에 체포된 한영덕은 모진 고문을 이겨내 간첩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지만 의료법 위반으로 실형을 살게 된다.

그는 옥중에서 딸 혜자를 얻고 출옥한 뒤 암울했던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가출을 한다. 한영덕은 이곳 저곳을 떠돌면서 지방대학 관리인 노릇 등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장의사의 염사(염을 하는 사람)로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이처럼 주인공 한영덕은 힘든 환경 속에서도 삶에 대한 신념을 지키려했던 인간이었으나 역사와 인생의 아이러니(irony)로 인해 그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일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연출을 맡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김석만 교수는 “초연 이후 약 20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남북 분단 상황은 무엇이 달라졌을까. 어찌 보면 상당히 많이 변했고 어찌 보면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면서 “여기에 시대를 뛰어넘는 한 인간의 정체성 찾기가 더해져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초연 때부터 ‘일인다역(一人多役)’ ‘마당극’ ‘미니멀리즘(minimalismㆍ최소한주의)’ 기법이 채용돼서 극에 속도감과 재미를 더해줬기에 20년이 지난 지금 보더라도 전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주연을 맡은 강신일은 연극 ‘칠수와 만수’ ‘날 보러와요’ ‘김치국씨 환장하다’, 영화 ‘공공의 적’ ‘광복절 특사’ ‘실미도’ 등에 출연한 베테랑 연기자. 기자가 관람한 날 공연장에서는 안성기, 설경구, 임원희 등 ‘실미도’에서 함께 고생했던 배우들을 다수 만날 수 있었다. 2월 29일까지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주간조선
서일호
[ⓒ 플레이DB www.playdb.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