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난 파리의 가난한 연인 로돌포와 미미, 결실을 보지 못하는 이들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서울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오페라로 만났다. 지난 18일 막이 올라 23·24일 공연을 남겨둔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이다.

올봄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투란도트’를 공연한 한전아츠풀센터가 주최한 이번 ‘라보엠’은 국내 오페라 사상 처음으로 실내체육관을 공연장으로 활용하고, 지름 40m의 대형 원형무대를 도입해 눈길을 끌었다.

‘라보엠’은 무대 위의 가수진은 수준급이었지만 조명과 무대, 연출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음향은 극장 오페라만큼 섬세하지는 못했지만, 역대 경기장 공연 또는 오페라 가운데 가장 자연스럽고 좋았다. 공연이 시작되자 무대 스크린은 영화 ‘물랭루즈’의 첫 장면을 보는 듯 다락방에서 본 몽마르트르 언덕 등이 잿빛 파리 하늘에 덮여 있는 모습이었다. 막을 진행하면서 차츰 눈 덮인 겨울의 파리 정경을 비추는 등 스크린 영상에 변화를 주었다.

경기장(아레나)이라는 성(姓)을 가진 지휘자 마우리치오 아레나는 노련한 지휘로 서울시교향악단을 요리, 꽤 수준 높은 ‘라보엠’ 반주를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로돌포 역을 맡은 테너 배재철의 자신감 넘치는 가창과 음색은 이탈리아 가수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1막 아리아 ‘그대의 찬손’과 이중창 ‘오 아름다운 아가씨’에서의 탄력적인 하이 C, 4막에서 미미가 죽었을 때 처절하게 우는 장면 등 배재철은 ‘라보엠’을 이끌어나갔다.

1, 2막에서는 돋보이지 않았던 미미 역의 소프라노 마리아 피아 요나타의 진가는 시종일관 한 호흡으로 별리(別離)를 노래하는 3막에서 푸치니 여주인공의 비련과 비장미를 더하며 빛났다. 특히 3막에서 들려준 배재철과 마리아 피아 요나타의 열창은 드넓은 무대를 잊게 만들어줄 정도로 무대 위의 두 사람에 집중하게 했다. 이들과 교대로 출연한 소프라노 디미트라 테오도슈(미미), 테너 페르난도 델 라 모라(로돌포), 소프라노 전소은(무제타), 바리톤 실바노 카롤리(마르첼로) 등 성악가들도 푸치니의 감미로운 아리아들을 무리없이 열창, 극의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

프랑스 연출가 베르나르 슈미트의 연출은 평범했다. 실내극장과는 다른 대형 원형무대를 커버할 연출적 장치를 더 녹여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규모 인원을 투입한 2막 군중 장면 초반에는 로돌포와 미미를 군중 속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4막에서 미미의 죽음을 상징한 보라색 조명과, 미미가 죽었을 때 화사한 꽃이 피며 감정선을 건드리는 장면을 빼면 무대와 조명 디자인도 단조로웠다.

이날 공연장이었던 체조경기장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가난하고 소박하고 추운 ‘라보엠’ 원작의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휴식시간에 오뎅이나 따뜻한 국수를 먹는 청중의 모습은 어찌나 ‘라보엠’ 속 등장인물과 비슷해 보이던지.

출처 : 조선일보 장일범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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