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야연'…낮에는 농사 밤에는 연극
28년 보금자리 대학로 떠나 24일 단양서 개관
야외무대서 개막작 '노인과 바다' 올린 자리
정재진 대표 출연한 '고도를…' 배우 총출동

치솟는 임대료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28년 역사의 서울 대학로시대를 접고 귀촌한 ‘대학로극장’이 24일 충북 단양에서 ‘만종리 대학로극장’으로 다시 개관했다. 장대비가 퍼붓는 날씨에도 128석을 가득 메운 마을주민들이 배우 정재진 만종리 대학로극장 공동대표(오른쪽)와 배우 이동준이 열연하는 개관작 ‘노인과 바다’를 지켜보고 있다(사진=김미경 기자).

[단양(충북)=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감개무량하다”(정재진), “연극 농사 잘 짓겠다”(기주봉).

전국에 장맛비가 무섭게 쏟아지던 지난 24일 저녁. 충북 단양군 영춘면 만종리에 첫 야외무대를 마련한 두 공동대표의 소감은 생각보다 짧았다. 이날 두 대표는 대학로시대를 마감하고 만종리시대를 열었다. 28년 역사의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극장 보금자리를 접고 귀촌한 지 3개월여만이다. 대학로극장은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운영난을 겪으면서 지난 4월 오랜 터전이던 서울 대학로를 떠나 올봄 단양 만종리로 터전을 옮겼다. 이름도 ‘만종리 대학로극장’으로 고치고 지금은 마을에서 마련해 준 빈 집 한 채와 마을회관, 청년회 사무실 등을 임시 거처로 쓰고 있다.

정재진·기주봉 만종리 대학로극장 공동대표가 개관식에서 성공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고 있다(사진=김미경 기자).

정재진 대표는 “지난 5월 내려온 후 정신없이 바빴다. 몸은 오십견이 올 정도로 고되지만 마음은 가볍고 기쁘다”며 “이날 개막한 첫 연극 ‘노인과 바다’를 시작으로 차근차근 다양한 무대를 선보일 계획이다.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기주봉 대표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연극인으로 돌아온다. 땀을 흘리며 시작의 의미를 다시 잡아보자는 다짐이자 지역주민과의 화합이 우선이라는 생각에서다”라며 “또 입장료 수입이나 지원금에 기대지 않고 자생력을 확보하려는 취지”라고 귀띔했다.

이날 현장은 마을축제와 다름없었다. 폭우 속에서도 마실나온 주민과 이장, 충북의회장과 단양 연극인 및 심재찬 대구문화재단 대표, 정대경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서울서 달려온 배우들까지 300여명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개관식이 펼쳐졌다. 최근 정 대표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 정동환·한명구·이영석·안석환·박상종 등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가장 먼저 북소리와 함께 ‘만종리 대학로극장 세계공연의 장이 되리라’는 선포에 이어 배우들의 축하말이 쏟아졌다. 배우 정동환은 “어떤 일이든지 시작은 작다. 하지만 결과는 상상할 수 없다. 오늘 이렇게 비가 내리는 것도 이곳이 얼마나 크게 더 발전해야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시련이라고 본다. 틀림없이 이 작은 일이 대한민국 문화를 융성하게 만들 것이다”고 외쳤다.

배우 서이숙도 “극장이 이곳에 세워진다는 게 기적인데 만종리 주민과 시작하려고 한다. 이렇게 큰 예술인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은 만종리의 큰 축복이다. 문화축제마을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 오늘 밤 마음껏 즐기자”고 말했다. 단양의 한 극단 연극인은 “대학로극장이 운영이 어려워 충북 단양에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죄송하지만 환호성을 질렀다. 너무 행복했다. 호박이 굴러오는 구나 싶었다”며 “만종리에 연극의 불을 지펴주길 바란다”고 환영했다.

24일 ‘만종리 대학로극장’ 개관식에 참석한 배우 정동환(오른쪽부터)과 서이숙, 심재찬 대구문화재단 대표가 정재진(왼쪽) 만종리 대학로극장 공동대표와 이야기하고 있다(사진=김미경 기자).

개관작은 헤밍웨이 원작 ‘노인과 바다’. 막이 오를 때는 사뭇 진지해졌다. 수박과 수수를 심은 밭 한가운데 마련된 야외무대를 앞으로 128석의 객석을 가득 채운 마을주민들은 배우 정재진과 이동준의 열연에 숨을 죽였고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질펀한 추임새를 넣었다. 비가 세차게 퍼붓다 멈추기를 반복, 극 말미에 정 배우의 독백이 가슴을 깊이 후볐다. “절대 절망하지 않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상대 배우 이동준의 대사가 맞받았다. “할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언덕을 오릅니다.”

개관작 ‘노인과 바다’에 이어 내달 1일부터 9일까지는 연극 ‘다녀왔습니다’, 7∼8일에는 ‘이별의 말도 없이’를 간이무대에 올린다. 공연이 끝나면 자정까지 가수 한영애와 해바라기 등의 부대공연을 이어간다.

1987년 150석 규모로 개관한 대학로극장은 샘터파랑새극장(1984), 연우소극장(1987)에 이어 대학로에서 세 번째로 긴 역사를 가진 극장이었다. 창작극 활성화와 소공연장 발전을 목표로 극단 현대극장의 전용공연장으로 문을 열었고, 1991년 정 대표가 대중화를 목표로 한 실험적인 연극을 만들겠다며 극장을 인수하며 극단 대학로극장을 창단했다. 극단 대학로극장은 창작극 ‘불 좀 꺼주세요’가 20만명의 관객을 동원, 3년 장기공연이란 기록을 세운 이후에도 창작극을 중심으로 다양한 공연을 올려 왔다.

충북 단양으로 귀촌한 ‘만종리 대학로극장’의 개관을 환영하는 만종리 주민의 입간판이 마을 입구에 걸려 있다(사진=김미경 기자).

지난 24일 충북 단양 ‘만종리 대학로극장’ 개관식에 참석한 배우 정동환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사진=김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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