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물결은 파도를 이끌고 온다. 작은 물방울이 떨어져 은파를 만들 수도 있고, 모든 것을 삼켜 다시 토해내는 해일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다. 예술, 정치, 사회, 종교 등은 끊임없이 제 모습을 바꾸며 사람과 함께 살아왔다. 어쩌면 ‘이것의 본질은 그것’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

연극 ‘레드’는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레드’가 ‘블랙’이 되는 순간 생명은 죽음이 된다. 비어버린 옛것의 자리에는 언제나 새로운 태양이 뜨고, 부인하면 할수록 단단함은 안쓰러움으로 남는다. 옛것이 더 옛것을 밀어내던 시절에도 그러했다.

곳곳에 치밀함 간직한 ‘숨은그림찾기’

팝아트가 현대미술의 새로운 사조를 이끌기 시작하던 시기, 추상표현주의의 대가(大家) ‘로스코’는 한물간 구세대 화가다. 예술이 ‘거래’되는 것을 경멸하던 그는 돌연 상류사회의 상징 ‘포시즌 레스토랑’에 걸릴 벽화를 의뢰받고 작화를 시작한다. ‘로스코’는 40여 점의 거대한 벽화를 완성하기 위해 젊은 화가인 ‘켄’을 조수로 고용한다. 둘은 각각 구세대와 신세대를 대변하며 열띤 작업과 토론을 이어간다.

‘로스코’는 시종일관 권위적이다.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따위’는 가볍게 비웃으며 오직 자신만이 숭고한 예술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켄’이 던지는 말 한마디마다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쏘아 올린다. 하지만 그런 ‘로스코’가 앞뒤 꽉 막힌 늙은이, 또는 과거에 집착하며 자위하기 좋아하는 인사가 아니라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그는 한 편의 사이코드라마를 찍듯 ‘켄’을 몰아붙이면서도 ‘켄’의 항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면밀히 포착해낸다. 입과 손으로는 열심히 ‘No’를 외치지만, 무대 위 100분은 ‘로스코’의 심경 변화를 그리는 데 부족함이 없다.

연극 ‘레드’는 그 제목처럼 단순하고 명료하며 한 치의 가식도 없다. 작품은 관객들이 미술이라는 장르를 얼마나 이해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애초에 고려하지 않는다. 대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주의’나 ‘○○파’라든지, 이름도 외기 힘든 화가들의 나열에도 전혀 당혹스럽지 않은 까닭이다. 관객이 집중해야 할 것은 두 인물의 설전 속에서 선연히 빛나는 회로를 따라가는 일이다.

두 인물의 논쟁이 절정에 치닫는 장면에서 ‘켄’은 “사람들에게 예술이 어때야 한다고 얘기하는 거 지겹지 않으세요?”라며 체념 섞인 질문을 던진다. 여기서 ‘예술’이라는 키워드는 ‘사랑’, ‘정치’, ‘가족’ 등 수많은 말들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이는 작가가 미술에 대한 관객의 접근성을 예단하고 규정한 채 대본을 썼다면 쉽게 나올 수 없는 메시지다.

놓치기 아까운 배우예술의 향연

연극 ‘레드’의 무대는 사실적이고 빈틈이 없다. 작품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특유의 독립성과 깊이를 십분 활용해 실존인물인 ‘로스코’의 작업실을 구현한다. 어둡지만 우울하지 않은 무대는 그림을 그릴 때 자연광을 일절 배제하는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진지함과 예술을 향한 열정을 동시에 살려낸다.

조명은 하나의 ‘레드’를 이리저리 비추며 때마다 다른 느낌을 전달한다. 고유의 색감을 해치지 않으면서 인물의 감정선을 그대로 밟아나간다. 특히 ‘로스코’와 ‘켄’의 관계가 긴밀해지며 갑자기 형광등이 켜지는 장면은 압권이다. 관객은 일순간 예술의 허울 좋은 ‘고상함’을 떨치고 실체를 응시하며 논쟁의 주체가 된다.

연극 ‘레드’는 오직 배우의 힘으로 움직이는 2인극이다. 희곡을 기반으로 하는 장르 중 배우예술이 돋보이는 장르는 단연 연극이다. 이러한 점에서 연극 ‘레드’는 배우의 호흡과 대사, 동선 하나까지도 놓칠 수 없는 작품이다. 그에 담긴 수많은 의미가 드라마와 절묘하게 밀착되어 있다. 강신일과 강필석은 균형 잡힌 배우예술을 선보이며 에너지를 쏟아낸다.

‘로스코’로 분한 강신일은 30년 가까이 연기자로 살아온 관록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뭐가 보이지?”라는 짧은 대사에서부터 ‘켄’의 공격에 맞서 자기를 변호할 때도 한 치의 흔들림이 없다. 자신만큼 상대방의 캐릭터도 철저히 분석해야만 나올 수 있는 연기다. ‘켄’ 역의 강필석은 구시대의 몰락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새로운 세대로서 치고 올라가야 하는 고뇌를 솔직하게 담아낸다.

노오란 기자 newstage@hanmail.net
사진_신시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