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다, 피에르

피에르와 원표는 서로 같은 상처를 안고 있는 인물이지만 기본적인 성향은 다르다. 피에르는 프랑스의 귀족 집안에서 자라 화려한 삶을 살아왔다. 그는 일반 서민은 상상할 수도 없는 부와 자유와 오만을 누리고 있는 철저한 지배층이다. 민중을 향해 ‘쥐새끼, 버러지, 유령들’이라고 말하는 피에르의 모습은 전형적으로 묘사되는 지배층의 모습이다.

피에르에게 세상은 아름답고 충분한 것이었다. 그는 달콤한 와인이 담긴 잔을 흔들며 무도회장을 누비고, 자신의 곁을 지키는 사랑스러운 약혼녀에게 영원한 사랑을 속삭였다. 그에게 삶이란 그렇게 충만하고 완벽한 것이었다. 그 완벽한 세상에 균열을 만들고 레옹이 침입했다. 레옹에게 피에르가 적이자 원수라면 그에게 레옹은 그의 여자를 강탈하고, 그의 삶을 침략했으며, 그의 이성을 마비시킨 또 다른 약탈자다.

피에르는 사랑을 빼앗으려는 레옹에 대한 증오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약혼녀의 방종을 확인하기 위해 그들을 지켜보기로 한다. 하지만 사랑의 배신은 그가 감당하기 어렵도록 강렬한 것이었다. 피에르는 끝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 뛰어든다.

그에게 완벽했던 삶은 이미 마리안느가 떠났을 때부터 끝난 것이었을까. 태양과 가까워지고 싶었던 이카루스의 열망처럼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프랑스 왕정 속에서 완벽한 삶을 누리고자 했던 귀족 피에르의 열망은 프랑스 혁명 속에서 뜨겁게 사라진다. 끝을 맞이한 피에르가 부르는 ‘이카루스의 노래’는 그래서 더 슬프다.

현실과 사랑 사이에서…냉철한 낭만주의자, 원표

원표는 19세기 조선의 지식인이다. 뚜렷한 판단력을 지닌 현실주의자지만 사랑하는 여인의 영웅으로 남고자 혁명에 가담하는 뜨거운 가슴의 청년이다. 그것이 설사 일본에 의지한 급진개혁파의 다소 무모해 보이는 개혁이라 하더라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사랑을 떳떳하게 밝히고 또 떳떳하게 사랑받기 위해서다. 하지만 피에르에게 닥친 사랑의 절대 비극은 그에게도 찾아온다. 함께 개혁을 꿈꾸던 동지 홍규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서도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된 원표는 서서히 굳기 시작한다. 친구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들을 감싸고 있던 혁명의 기운을 식어버린 가슴으로 합리화한다. 서도를 위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던 열혈 청년은 차가운 강 위 아슬아슬한 살얼음으로 변해 버린다.

원표는 결국 최후의 선택을 감행한다. 사랑하는 여인을 외면하고 혁명을 냉정하게 바라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선과 냉정은 질투지만 질투가 아닌 듯이, 사랑이지만 사랑이 아닌 듯이, 분노이지만 분노가 아닌 듯 가장한 것일 뿐이다. ‘실패한 사랑’이라는 그의 분노는 ‘어차피 실패할 혁명’이라는 변명으로 대체된다. 마지막 장면, 모두를 잃고 살아남은 원표의 모습은 그것이 변명일 뿐이어서 더 허무하다.

비슷한 듯 다른 캐릭터 그려낸 배우 박성환

박성환은 주로 대극장 무대에서 활동해 온 배우다. 뮤지컬 ‘피맛골 연가’, ‘노트르담 드 파리’, ‘로미오&줄리엣’ 등에 출연했다. 그는 작품마다 풍부한 성량과 매력적인 음색을 선보여 왔다. 지난해 무대에 오른 ‘바람의 나라’에서는 중요 캐릭터인 ‘운’으로, ‘피맛골 연가’에서는 ‘김생’으로 변신해 좋은 모습으로 관객을 만났다.

뮤지컬 ‘라 레볼뤼시옹’에서 그는 사랑과 이상,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조선의 청년 원표와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분노하는 프랑스의 귀족 피에르를 맡아 열연을 펼쳤다. 그는 피에르와 원표가 레옹과 마리안느, 홍규와 서도를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을 떨리는 손으로 표현하는 등 같은 듯 다른 느낌의 캐릭터에 동질성 부여해 그려냈다. 특히, 박성환은 이번 공연을 통해 소극장 무대에 서며 노래뿐 아니라 연기적으로 한 발 더 발전된 뮤지컬배우로서의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줬다.

뮤지컬 ‘라 레볼뤼시옹’은 1월 29일까지 대학로 연우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정지혜 기자 newstag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