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리 연출을 지칭하는 말에는 ‘여성 전문공연기획자 1호’, ‘여성 프로듀서 1호’ 등 다양한 수식이 따라붙는다. 스스로 “편력이 심하다”고 인정할 만큼 광범위한 그의 활동 범위는 한 사람의 이력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동숭아트센터, 서울예술단, 민간프로덕션, 극단 등을 거치며 단단하게 내공을 다져온 그가 현재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역할로 꼽은 것은 의외로 ‘연출’이었다. 이제는 작품을 떠나, 끊임없는 도전정신으로 선례가 없는 첫 페이지를 써 내려온 이유리 연출의 ‘도전적 역사’에 대해 물었다.

-이제 작품에 상관없이 연출님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다양한 역할로 활동해오셨죠. 자신에게 가장 큰 카타르시스와 성취감 주는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연출이에요. 저는 40대 초반까지 공연기획자로 살았습니다. 어느 매체에서 ‘여성 전문공연기획자 1호’, ‘여성 프로듀서 1호’라고 말하는 것을 봤는데요. 저는 제가 프로듀서 지향의 인간이라기보다는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일이 맞는 사람인 것 같아요. 사업가로서의 프로듀서는 내 기질과 맞지 않다는 것을 진즉 깨달았죠. 현장에서 창의적인 콘텐츠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할 때 성취감을 느껴요.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을 어떻게 보면 편력이 심하죠. 이렇게 저만큼 많이 거친 사람도 흔하지 않을 거예요.(웃음) 동숭아트센터, 서울예술단, 민간프로덕션, 극단 등 다양한 과정과 풍토를 겪어왔어요. 향후에는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을 종합한 창작 뮤지컬시대가 온다고 봅니다. 현재 굉장히 필요한 인력이 바로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에요. 창작뮤지컬을 개발하는 프로듀서 말이죠. 제가 지금까지 과정을 다 종합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그 일이 아닐까 생각해요”

-현재 한국 내 창작뮤지컬의 단계는 어디쯤 와 있다고 보시는지?

“산업화초기단계죠. 아직 산업화되지 않은 단계에요. 아직까지 라이센스 주류시장이고 내수시장에 한계가 있어요. 향후 창작콘텐츠를 개발해서 적어도 아시아 시장으로라도 시장을 확대하는 것이 한국창작뮤지컬이 가진 큰 숙제에요.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시장이 되기 위한 기반들이 마련되는 것도 중요해요. 올해 들어 창작뮤지컬 제작의 패러다임이 바뀌었습니다. 소극장창작뮤지컬 중에는 지원제도를 통해서 아티스트가 직접 프로덕션의 역할을 하는 공연도 생겨났죠. 그 예가 ‘식구를 찾아서’나 ‘모비딕’과 같은 작품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올해 시장 전체를 변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적극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어요. 한국뮤지컬협회도 활성화되고 있고요. 저는 뭐든지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에요. 뭐든지 제 확신에서부터 출발해요. 가능하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죠. 그런데 사회에서 공연종사자로 평생 살려면 그 힘이 아니면 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선례도 없고, 시장도 형성돼 있지 않기 때문에 뭐든지 최초의 시도가 되는 거예요. 최초의 시도를 하는 사람이 자기확신이나 ‘무조건 된다’는 비전이 없으면 도전할 수가 없어요”

-말씀을 듣고 있으니 문득 궁금해지는데요. 사적인 시간은 있으신가요?

“예전부터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가만히 생각해보는데요. 사적인 시간이 없어요. 없는데 어떻게 노느냐 하면 일하면서 놀아요. 그것이 그냥 삶이에요. 공연이 곧 제 삶이고, 노는 것처럼 즐겁기 때문에 공과 사를 구분 짓지 않아요. 저는 창의적인 작업 환경에 있을 때 가장 신나고 즐겁게 노는 것 같아요. 젊었을 때는 30대 중반까지 외롭고 공허할 때가 많았어요. 그때는 목숨을 걸고 했으니까. 목숨 걸듯이 그러고 난 후에 빈집으로 돌아갈 때 묘하게 공허했죠.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내부가 단단해진 것 같아요. 확신도 생긴 것 같고. 외로운 것도 별로 안 느끼는데 그 이유가 요즘에 와서 나만을 위한 시간, 내 존재 자체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여백과 여유를 가져서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학교로 가서 학생들과 지내는 시간이 참 행복합니다. 그러면서 공허감이 자연스럽게 없어졌어요”

-수식, 역할, 직책, 이력 모두 떼어놓고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을 붙이신다면?

“‘도전하는 사람’이요. 저는 항상 그렇게 살아온 것 같아요. 자신을 충동질하는 무엇이 있다면 물불 안 가리고 해왔죠. 2003년도에 ‘페퍼민트’ 같은 뮤지컬을 제작했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겁이 없었어요. ‘결혼하고 싶지 않느냐’, ‘자식 가지고 싶지 않느냐’는 말을 종종 듣는데요. 저는 작품을 낳고 싶어요.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요. 그것이 제겐 자식 같은 것이고 결혼을 해서 얻어지는 결과물이나 마찬가지예요”

-여전히 사적인 영역은 엿보기 힘드네요. ‘완벽주의자’란 말을 곧잘 듣지 않으신지?

“아 좀 그랬어요.(웃음)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기획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30대 초중반 기획자 중에 제 제자인 기획자들이 많았어요. 그 때 한 친구가 ‘숨을 못 쉬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저희는 도제시스템으로 전수되니까요. 지금은 자기 회사일 하면서 열심히 하는 친구인데 꿈에도 나타났다고 그랬어요.(웃음) 지금은 같이 놀아요. 옛날에는 그랬다면서 지금은 많이 변했다고 해요. 많이 편해졌다고. 하지만 변하지 않는 꿈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창작콘텐츠를 만드는 것이에요. 만들고 죽고 싶어요”

-연출님의 전체 인생그래프에서 현재 2011년은 어디쯤이라고 보시나요?

“예전에 저는 앞으로 뭘 만들고 일할 수 있는 시간이 15년 정도 남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협회모임 끝나고 송승환 대표님이 그러더라고요. 이제는 수명이 길어져서 누군가 송승환 대표님도 아직 30대 말이라고 그랬다고요. ‘난 아직 청년이에요’ 그러시기에 ‘그럼 저는 20대 말이겠네요’ 그랬죠.(웃음) 저는 항상 벽에 부딪히면 선배들을 생각해요. 구체적인 모델을 선정하는 편이에요. 윤호진 선생님이 60세가 넘으셨는데 ‘영웅’을 만드시잖아요. 서른한 다섯 무렵부터 그랬어요. 제가 서른다섯일 때 ‘다른 선배가 서른다섯일 때는 어땠지?’ 하는 거에요. 선배들도 그 때는 완성돼 있지 않은 거예요. 이윤택 선생님이 그런 생각을 처음 심어주셨어요. 제가 공연 쪽 일을 계속 해야 하나 하는 굉장히 심한 회의에 빠져 있었을 때 급히 부산 가마골 소극장에서 ‘신의 아그네스’를 연출하라고 하신 거에요. 긴급상황을 해결하고 통화를 하는데 선생님이 ‘너 지금 33살이지? 내가 연희단거리패 만들었을 때 몇 살이었니’ 하시는 거예요. ‘35살이요’ 했더니, ‘비교해봐. 나는 35살에 연희단거리패를 만들었을 뿐인데 너는 33살에 동숭아트센터의 기획부장이고, 인프라를 가지고 있고, 내가 35살에 만들어놓은 것 이상을 만들었어.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무엇을 좌절하고 공연계를 떠나려고 해?’ 하시더라고요. 그때 떠나지 않고 더 도전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여자 세 명이서 ‘컬티즌’이라고 기획사를 만들었어요. 지금도 정애영 씨가 대학로에서 하고 있죠. 그때부터 저는 벽에 부딪힐 때마다 구체적으로 업계 선배를 모델로 생각해요. 37살에 신선희 선생님은 뭘 했지? 38살에 이윤택 선생님은? 이런 식으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선배들을 생각하면서 여기까지 온 거에요”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