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크다! 우와~ 작다! 그를 보며 교차한 두 가지 생각이다. 고개가 꺾이게 올려다봐야 하는 큰 키, 열 살 정도에 성장이 멈췄을 것만 같은 작은 얼굴. 가까이 마주하니 9등신도 넘을 것 같은 프로포션이 무대에서 볼 때보다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배우 김산호. 이 이기적인 비율의 소유자는 뮤지컬 ‘바람의 나라’의 무휼과 괴유, ‘그리스’의 미끈한 바람둥이 대니, ‘쓰릴미’의 옴므 파탈 리처드 등 비주얼이 돋보이는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왔다. 이렇듯 현실과는 거리를 둔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온 그가 최근 관객에게 보다 가깝게 다가서고 있다. 뮤지컬 ‘판타스틱스’의 풋풋한 시골 청년 ‘마트’를 통해서다. 배우는 캐릭터를 닮아간다고 했던가. 인터뷰를 위해 만난 김산호의 눈빛에는 소년이 담겨 있었다.


순수로의 회귀, 뮤지컬 ‘판타스틱스’

‘판타스틱스’는 브로드웨이 단일 극장에서 50년간 공연된 최장수 뮤지컬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을 정도로 오랜 기간 사랑받아온 작품. 소년(마트)과 소녀(루이자)의 성장기가 둘을 맺어주려는 아버지들의 고군분투 속에 잔잔하게 펼쳐지는 뮤지컬로 자극적인 소재가 판치는 요즘 추세에 비춰보면 심심해 보일 수도 있다. 김산호는 그러나 바로 그 점이 ‘판타스틱스’를 봐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처음 대본을 받아보고는 요즘 이런 얘기가 과연 통할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참 따듯해지고 위로받는 것 같더라고요. 저희 공연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순수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어요. 사실 누구나 마트와 루이자 같은 시절이 있잖아요. 공연 준비하면서 그 시절로 돌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김산호는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에도 출연하면서 무대와 브라운관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김산호가 연기하는 배역은 외모지상주의자 디자이너로 마트와는 정반대의 캐릭터. 차가운 도시 남자의 아우라를 팍팍 풍기는 드라마 캐릭터와 수줍은 청년 마트를 동시에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큰 키와 작은 얼굴, 서툰 몸짓과 맑은 눈빛이 어우러진 김산호의 마트는 세상사에 미숙한 몸만 자란 소년을 보는 듯해 묘한 공감을 일으킨다.

“제가 평범하지 않은 역할을 주로 해와서인지 마트가 과연 어울릴까 하는 분들이 많으셨어요. (웃음) 하지만 제 평소 성격은 마트와 가까워요. 소박한 걸 좋아하고… 제 꿈도 뭐 대단한 걸 이루는 것보다는 부인, 자식들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거거든요. (웃음) 그런 마음이 이 작품과 잘 맞는 것 같아요.”

‘판타스틱스’ 속 마트와 루이자는 오해와 갈등의 시기를 거쳐 성숙한다.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했던 풋사랑 또한 서로를 들여다보고 이해하며 여물어간다. 마트로 무대에 서며 사랑과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는 김산호. 그가 꿈꾸는 사랑의 판타지는 무엇일까?

“최근에 아버님이 좀 편찮으셔서 입원하신 적이 있어요, 그 때 어머니가 아버질 돌보는 걸 보면서 아 불타오르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죠. 백발이 돼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제가 꿈꾸는 사랑의 판타지예요.”

서른 즈음에 앓은 성장통

‘쓰릴미’, ‘신상남 콘서트’, ‘바람의 나라’, ‘그리스(지방 공연)’, ‘판타스틱스’까지… 2009년엔 김산호를 무대에서 유독 자주 볼 수 있었다. 그가 그토록 무대에 집중한 이유가 궁금했다.

“2009년은 정신적으로 참 힘든 한 해였어요.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한 성장통을 앓았다고나 할까. 내년이면 서른인데 이뤄놓은 건 없는 것 같아 조급해지더군요. 그래서 기회가 주어지는 끌리는 공연은 다 해보자 생각했죠.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지만 배우로서 입지를 다져놓지 않으면 미래는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렇게 정신없이 달린 한 해, 각각의 공연이 김산호에게 주는 의미를 물었다.

“데뷔작이기도 한 ‘바람의 나라’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그리스’는 배우도 관객도 참 즐거운 작품이고요. 하지만 대니로 무대에 서는 건 올해가 마지막이에요. 좀 더 젊은 친구들이 해야죠. (웃음) ‘쓰릴미’는... 어쩌면 ‘쓰릴미’ 덕분에 제가 무대에 계속 서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쓰릴미’하기 전까지 고민이 되게 많았어요. 배우가 내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던 때였죠. 그래서 ‘쓰릴미’를 마지막으로 해보고 연기를 계속할 건지 말건지 결정을 하자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작품을 통해 캐릭터에 완전히 빠졌을 때의 즐거움을 다시 찾게 됐어요. 기회가 된다면 네이슨에도 도전하고 싶어요.”

‘바람의 나라’, ‘그리스’로 이름을 알리고 ‘쓰릴미’를 통해 연기하는 즐거움을 맛봤다는 김산호. 그렇다면 이십대의 끝자락에 선택한 ‘판타스틱스’는 어떨까?

“‘판타스틱스’는 연기적인 부분에서 유연함을 찾게 해준 작품이에요. 소극장 무대에서만 배울 수 있는 부드러움. 연기를 떠나 제 자신을 정화시켜준 작품이고요. 처음에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 작품에는 인생이 담겨있더라고요. 스물아홉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인생 공부가 된 작품입니다.”


김산호를 읽는 키워드 ‘여유’

서른 즈음에 앓은 격렬한 성장통 후에 그가 내린 결론은 바로 ‘여유’다. 그리고 ‘여유’란 단어는 김산호라는 사람을 읽는 키워드다.

“저는 여유라는 말을 좋아해요. 그래서인지 연기 호흡이 짧은 드라마보다 충분한 준비 과정을 거치는 뮤지컬이나 영화가 제 성향과 맞아요. 여유로운 걸 좋아하고 여유 있는 사람을 좋아하고 여유 있어 보이길 원해요. 그런데 돈이나 명예를 좇다 보면 여유를 잃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천천히 오래오래 하는 배우가 되자는 거예요.”

최근에 인터넷 쇼핑몰의 CEO가 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언젠가 영국 여행을 하면서 그네들이 삶을 바라보는 여유로운 시선이 무척 좋아보였다는 김산호. 그래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면 영국에서 꼭 한번 살아보리라 결심했단다. 사업가 김산호는 배우 김산호의 여유로운 미래를 위한 대비책인 셈.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는 그는 동대문에서 의류 사업을 하던 친구와 의기투합했다고.

“전 연기는 제 삶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연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전부는 아닌 거죠. 인생의 첫 번째 목표는 행복해지는 거고 그러기 위해선 직업이 있어야 하고, 가족을 꾸릴 수 있는 여력이 있어야 해요. 남편, 자식, 아버지로서 떳떳함이 있어야 하고요. 연기를 위해서 가족을 포기하고 소중한 것들을 희생시키고 싶진 않아요. 연기에 올인하지 않으면 이도저도 안된다고 하는 선배님들도 계신데요. 저는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꿈을 향해 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요.”

(뮤지컬 ‘판타스틱스’: 2010년 1월 17일까지. 대학로 문화공간 이다 2관)

p.s 쇼핑몰 CEO 김산호가 베스트 드레서로 꼽는 동료 배우는?
“(이)기우가 옷을 튀지 않으면서도 세련되게 잘 입어요. 뮤지컬 배우 중에선 상윤이가 깔끔하게 잘 입는데 한 가지 흠이 있어요. 너무 한 가지 브랜드만 입는다는 것. ‘쓰릴미’ 할 때 옷을 갈아입는데 바지, 셔츠, 재킷, 벨트, 시계, 심지어 속옷까지 c모 브랜드더라고요. 자기랑 잘 맞는다나요. (웃음)”

조수현 lovestage@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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