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웨스트엔드의 최고 흥행작 중 하나였던 연극 <엔론, Enron>이 브로드웨이에 입성했다. 그 결과는? 대참패.

지난 4월 27일 뉴욕 브로드허스트 극장(Broadhurst Theater)에서 정식 오픈한 이 연극은 15회의 공연 만에 문을 닫으며 미국 진출 실패를 인정해야 했는데, 이 결과를 두고 당사자들인 미국과 영국 두 나라 사이에서는 여러 해석들이 분분하다.

미국 텍사스를 중심으로 성장한 거대 에너지 기업 엔론의 실제 금융 스캔들을 다룬 이 연극은 무대에서 쉽게 다루기 힘든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 금융 위기의 한파 속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체감해야 했던 영국 관객들에게는 적절한 시기에 경제, 금융에 대한 이해와 함께 보는 재미를 선사하며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한때 미국의 일곱 번째로 큰 기업이었고 세계 최대의 에너지 기업이었던 엔론은 정경유착, 불투명한 거래와 부정확한 회계 및 감사, 기업 임원들의 도덕적 해이 등이 원인이 되어 2001년 당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기업 파산을 선언하며 불명예를 안고 사라진 회사다. 회사는 파산 후 청문회를 통해 텍사스 주지사 출신의 부시 전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정재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이 밝혀지기도 하여 더욱 충격을 주었다.


<엔론>이 뭐길래?

뛰어난 연출과 시사성 있는 주제

런던에서 연극 <엔론>이 남긴 결과는 달콤하다. 작년 7월 치체스터 페스티벌 극장(Chichester Festival Theatre) 초연 이후 9월 런던의 로열 코트 극장(Royal Court Theatre)으로 입성해 전회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연출을 맡았던 루퍼트 굴드는 이 연극으로 올리비에 연출상을 수상했다. 주요 신문, 잡지에서 최고의 평점을 받으며 현재까지 노엘 코워드 극장에서 공연을 이어가고 있는, 연극으로서는 드물게 커다란 성공을 이룬 작품이다.

사실 이 연극은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이나 상황묘사에 치중하기 보다는 금융 스캔들의 기승전결을 정치적 이슈들과 연결시켜 다큐멘터리화한 느낌이 더 크다. 무대 버전의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연극의 재미는 시각적, 청각적으로 잘 버무려진 루퍼트 굴드의 연출력에서 시작된다. 공연은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스토리를 여러 풍자적 캐리커쳐와 함께 뮤지컬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안무와 노래로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데, 예를 들어 리만 브라더스를 샴 쌍둥이로 코믹하게 형상화한 장면이나, 에너지 트레이더들이 스타워즈의 제다이처럼 광선검을 휘두르며 안무를 보여주는 장면, 회사의 불어나는 부채는 공룡 랩터로 형상화되어 주라기 공원을 연상시키는 장면 등이 재미있다.

20대 후반의 젊은 영국 작가 루시 프레블(Lucy Prebble)이 쓴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탐욕과 물질만능주의가 만들어낸 추악한 현실과 허망한 결과다. 신자유주의의 기치아래 모든 것이 거래 가능하다는 시장 경제 만능주의적 사고는 엔론이라는 에너지 기업을 자기함정에 빠뜨리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또 이러한 오만함은 인간의 탐욕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자기모순의 극대화를 낳는다. 끊임없이 무대 뒷편에 전사되는 월가의 주가 지표는 마치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들이 수치화되어 물질적 가치로만 존재하게 되어버린 느낌이다.


브로드웨이는 왜, <엔론>을 거부했을까?

이러한 영국에서의 열렬한 지지와 성공은 브로드웨이에선 철저히 무시되고 말았다. 브로드웨이는 왜 이 연극을 거부했을까?

우선 이를 두고 공연 관계자들부터 관객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몇 가지 실패 원인들을 나열해 보자.

첫째, 연극 <엔론> ‘파산’의 직접적인 원인은 올해의 토니상에서 신작 연극상을 포함한 주요 항목에 후보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이유와 더불어 뉴욕 시어터고어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지의 평가가 매우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 수 있다.

두 번째는 뉴욕 관객들이 과연 작품의 반미국적 정서를 인내할 수 있었겠느냐라는 반문에 있다. 실제로 <엔론>은 전방위적으로 미국적 정치, 경제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점들을 공격한다. 엔론이라는 회사의 몰락 과정을 통해 작품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미국적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회의적 의문을 제시한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르윈스키 스캔들, 엔론의 막강한 후원을 등에 업고 대통령으로 선출된 조지 부시 대통령의 취임식 장면 등이 무대 배경으로 등장하고, 뉴요커들에겐 커다란 상처로 기억되는 9/11 테러 사건도 추악한 스캔들과 함께 동일선상에서 보여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미국 관객들이 떨쳐버릴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이다.

또 다른 해석으로, 소재의 특성상 작품이 올려진 시기가 조금은 늦지 않았나 하는 지적도 있다. 분명히 런던에서 이 작품이 성공한 이유 중의 하나는 영국 경제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점들이 국민 개개인의 경제활동에까지 영향을 미치던 시기에 이 작품이 등장하면서 관객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브로드웨이 공연이 최소한 리만 브라더스가 파산했던 2008년 즈음에 올려졌더라면 흥행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우는 사람들도 많다.

마지막으로, 각종 시청각적 멀티미디어 장치를 극대화하여 마치 뮤지컬의 래즐 대즐(Razzle Dazzle)을 연상케하는 작품의 특수성이 리얼리즘을 선호하는 미국의 연극 팬들에게는 거부감으로 다가왔을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스모크 앤 미러 효과

양자간의 오고 가는 여러 이야기 속에서 개인적으로는 의외로 단순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공연에 대한 그들의 입장이 둘 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이러한 엇갈린 흥행의 결과는 어쩌면 당연했다는 생각이다.

밖에서 바라본 미국은 초강대국이면서 힘과 자본의 논리로 세계 질서를 이끌고 있는 나라이다. 이러한 국가를 다른 열등한(?)-영국이라고 생각해보자-나라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자연스레 미국이 주도하는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출발하려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엔론>는 그들에게 이러한 관점의 사유를 충분히 충족시켜 줄 뿐 아니라 더불어 문화, 예술적 가치까지 더해 준다. 특히나 모든 것에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영국인들에겐 이러한 소재는 참신하면서도 많은 토론 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미국 관객들에겐 어떠한가? 그들은 아마도 자국의 강대함을 자랑스러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국내에서 벌어지는 정,재계 지도자들의 비도덕적 행위들을 이미 TV를 통해 지겹도록 보아왔을 것이고, 어쩌면 그런 부도덕성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해 보고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지칠 대로 지친 그들에게 영국에서 들여온 연극 한편은 지난 아름답지 못했던 기억을 되새기는 불행한 두시간일 수밖에 없다. 작품이 최소한 그들에게 어떤 새로운 시사점이나 감상할 만한 미적 가치를 제시하기 전까지는.

그런 이유로 이미 충분히 알고있는 스토리를 보아야 할 의무감이 특별히 없는 미국 관객들에게 연극 <엔론>은 미국의 평론가들이 지적하듯 캐릭터의 부재, 극의 깊이 없음 등으로 요약될 수 밖에 없다. 즉 작품은 스모크 앤 미러 효과(Smoke & Mirror Effect)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아마도 공연이 사건의 진행에 관심을 갖기보다 그 안의 구성원들이 사건 속에서 느끼는 심리나 인간성을 묘사하는데 조금 더 중점을 두었다면 미국 관객들은 환호했을지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단순하게 젊은 20대의 영국 작가가 미국의 치부를 건드려 미국 관객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식의 일차원적 접근은 결론적으로 커다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사라지지 않는 작품의 가치

하지만 <엔론>의 브로드웨이 진출이 실패로 끝났다고 해서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얼마나 자주 이런 소재를 야심차게 웨스트엔드 메인 무대에 가져올 수 있을까? 그것도 관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그러한 희소성 때문이라도 우리는 작품의 제작진에게 충분히 격려의 박수를 보낼 필요가 있다. 최소한 미국 밖에서는.

사진: 연극 <엔론> 홈페이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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