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우리는 '남과 다름'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사회에서 살아왔다. 우리는 남다른 시각으로 사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작품들을 용감하게 선보일 것이다”
 
남산예술센터 우연 극장장의 말이다. 연말까지 10편의 공연을 선보일 남산예술센터는 이와 관련해 지난 7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올해 라인업을 공개했다. 이 자리에서 우연 극장장은 “1년 전 기자간담회에서 세월호 등 민감한 이슈를 다룬다고 하니 기자들이 우려하더라”며 “올해도 변함없이 민감한 동시대 이슈를 다루는 창작진들과 손을 잡았고, 그런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남산예술센터를 위탁 운영 중인 서울문화재단의 주철환 대표 역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시대정신과 실험정신이 있는 작품”이라며 우연 극장장의 말에 힘을 실었다.
 

(왼쪽부터) 우연 남산예술센터 극장장, 주철환 서울문화재단 대표

이들의 말처럼 남산예술센터는 올해 10편의 공연을 통해 검열, 성폭력, 학교 폭력, 분단 등 지금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여러 첨예한 이슈들을 다룰 예정이다. 리얼리티쇼 형식의 연극이나 시각예술과 연극을 접목시킨 공연 등 형식도 다양하다.
 
대부분의 작품은 남산예술센터와 민간극단이 협업해 만든다. 남산예술센터는 작품마다 약 3,000~6,000만원의 제작비를 비롯해 극장, 제작, 홍보마케팅 등을 지원하고, 각 극단도 자체 자본과 인력을 투입해 함께 작품 제작에 나선다.
 

남산예술센터 2017 시즌 라인업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등 검증된 작품 다시 무대로
젊은 연극인들의 실험 공연도 확대 버전으로 선보여   
먼저 지난해 관객들의 호평을 받은 연극 두 편이 예정돼 있다. 극단 골목길의 대표 박근형이 작/연출한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5.13~6.4)와 극단 신세계의 김수정이 작/연출한 <파란나라>(11.2~12)다.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군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부조리를 고발한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지난해 초연에서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 3’, 제53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박근형 연출은 “작년 공연을 마치고 주위의 몇몇 분들이 아쉬운 점들을 말씀해주셨는데, 그 부분을 수정해서 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파란나라>는 고등학교 교실에서 펼쳐지는 권력다툼과 집단주의를 그린다. 꼼꼼한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미래가 없는 현실 속에서 폭주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 지난해 큰 호평을 받았다. 2017년 <파란나라>는 학생들간의 집단주의를 넘어 개인의 자유와 존엄으로 주제를 확장시킨다고.
 

(왼쪽부터) 박근형, 김수정 연출

그간 젊은 연극인들의 페스티벌에서 소개됐던 작품들도 확대된 버전으로 무대에 오른다. 지난해 ‘권리장전2016_검열각하’에서 공연됐던 <2017 이반검열>(4.6~16)과 2015년 혜화동1번지 6기동인 가을페스티벌 ‘상업극’에서 주목받았던 <창조경제_공공극장편>(7.6~16)이다.
 
<2017 이반검열>은 정상/비정상을 구분짓는 폭력적인 잣대 속에 소외된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실제 당사자들의 구술을 대사에 녹여냈다. 구성/연출을 맡은 이연주는 “올해는 단지 성소수자들뿐 아니라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자들의 이야기까지 포함해 어떻게 사회적 검열이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지는 지 담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창조경제_공공극장편>은 서바이벌 리얼리티쇼라는 색다른 형식이 돋보이는 공연이다. ‘창조활동이 경제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라는 화두 아래 여러 극단원들이 제작비를 두고 경쟁을 펼친다.
 
창작 초연도 '시대정신·실험정신’에 초점
여섯 편의 창작 초연도 준비돼 있다. 지난해 <여기는 당연히, 극장>으로 제53회 동아연극상 새개념연극상을 수상한 구자혜가 작/연출한 <가해자 탐구_부록:사과문작성가이드>(4.21~30)는 지난해 SNS를 통해서 일각이 드러났던 예술계 성폭력 문제를 다룬다. 구자혜 연출은 “연극계의 성폭행과 연극이 여성을 다루는 차별적인 방식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다”고 밝혔다.
 
극단 돌파구의 전인철이 연출하는 <국부 國父>(6.10~18)는 박정희·김정일 등 남북한 지도자들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국부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묻고, 극단 백수광부의 이성열이 연출하는 <에어콘 없는 방>(9.14~10.1)은 지난해 제6회 벽산희곡상을 수상한 극작가 고영범의 <유신호텔 503호>를 원작으로 굴곡진 현대사를 관통해온 한 실존인물의 이야기를 그린다.
 

<천사(가제)>(8.30~9.3)와 <십년만 부탁합니다>(10.18~22)는 독특한 형식이 특징이다. <천사(가제)>는 단 한 명의 관객을 대상으로 드라마 없이 극장이라는 공간이 줄 수 있는 여러 공간적 감각을 선사하고, 설치작가 이주요가 참여하는 <십년만 부탁합니다>(10.18~22)는 배우가 아닌 사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오브제 시어터’ 공연이다.
 
2017년 시즌의 마지막을 장식할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11.23~12.3)는 권여선 작가의 동명소설을 박해성이 각색/연출한 작품. 2002년 월드컵 직후 한 여고생이 살해된 뒤 주변인물들이 여러 해를 걸쳐 겪는 일들을 담았다. “죽음이 만들어내는 치명적인 파장에 대해 성찰하고 싶었다”는 박해성 연출은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에 많은 죽음이 있었는데 우리는 애도보다 먼저 분노를 해야했다. 이 작품을 통해 죽음을 조용히 애도하고 성찰하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창작공연 공모 프로그램도 진행
12일까지 <서치 라이트 2017> 참여작 모집  
이밖에도 남산예술센터는 두 편의 공모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먼저 제작 전 단계의 작품 콘텐츠를 사전 공유하는 <서치 라이트 2017> 참여작을 오는 12일까지 모집한다. 신작을 준비 중인 개인/단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으며, 선정된 작품에는 제작비을 비롯해 관객 앞에서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8월에는 열띤 논쟁이 벌어지는 공간으로서의 극장의 의미와 공공성을 회복하고자 관객 참여형 공연을 공모하는 <남산 아고라>도 열린다.
 
최근 한국 사회의 여러 사건들과 “탄핵기각되면 언론·검찰을 정리하겠다”고 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 등으로 이날 기자간담회는 다소 결연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이에 대해 한 기자는 “옛날에 신림동 고시원 같은 곳에 모여 성명서 쓰던 분위기다”라는 농을 던지기도 했다. 대선을 비롯해 올해도 많은 파고가 예상되는 우리 사회에 남산예술센터의 작품들이 어떠한 메시지를 던질지 주목된다.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남산예술센터 제공